이종암 · 이강훈 · 엄순봉

이종암 · 이강훈 · 엄순봉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던 청년 지사들
독립장 1962, 독립장 1977, 독립장 1963

[ 李鐘巖 · 李康勳 · 嚴舜奉 ]

생몰년 이종암 1896 ~ 1930
이강훈 1903 ~ 2003
엄순봉 1906 ~ 1938

청년들, 항일 의열투쟁에 뛰어들다.

이종암 · 이강훈 · 엄순봉

의열이란 올바르다 여기는 것을 굳건히 지켜내거나 맹렬히 추구함이다. 의열투쟁이란 그런 의미를 띠면서 수행된 항일활동과 그 노선을 총칭하는 말이다. 올해 10월의 독립운동가는 죽음도 무릅쓰는 자기희생의 경지로 발을 들여놓아 의열의 불꽃을 크게 피운 세 분이다. 1910년대 말 혹은 1920년대 중반의 만주 땅에서 청년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얼마 후 중국 본토로 옮겨가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권력에 포박되어 험악한 옥고를 치루었고, 두 분이 끝내 순국하였다.

의열단이 전개해간 의열투쟁의 맹장 이종암

이종암

이종암

이종암은 1896년 (음)1월 12일, 대구부 해북촌면 백안동[현재는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하급관리 이석능(李石能)과 부인 남원 양(梁)씨 사이의 3남 4녀 중 차남이었다. 1902년에 대구면 서상동[현 대구 중구 서성로]으로 온가족이 이사해 대구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대구농림학교와 부산상업학교에 잇달아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1914년 대구은행에 취직했다.

결혼 후 출납계 주임으로 일하던 중 1917년 12월의 어느 토요일, 고객 예입금 전액(10,911원 50전)을 갖고서 종적을 감추었다. 인근의 칠곡군 약목면에 나무꾼으로 위장해 은신하고 있다가 1918년 2월 만주 봉천[지금 심양]으로 탈출하였다.

약정되었던 대로 거기서 지인 구영필(具榮佖)을 만나, 독립운동 연락기관 삼아 삼광상회를 개점해 동업하는 조건으로 거금 7천원을 건네주었다. 그 직후, 구영필은 모종의 혐의를 받아 평남경찰부에 붙잡혀갔고 빌려준 돈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그러자 이종암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입학하고 1919년 10월에 속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재학 중에 의기투합했던 김원봉(金元鳳)의 인도에 따라 이종암은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 본부가 있는 길림으로 갔다. 김상윤(金相潤) · 이성우(李成宇) 외 여러 명의 무관학교 동창생과 함께였다. 그렇게 모인 10인 청년이 황상규(黃尙奎)의 지도 아래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였다.

창단 직후부터 의열단은 총력을 기울여 국내 일제기관 강습거사를 추진하였다. 주 표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세 곳이었다. 이종암이 갖고 있던 3천원을 준비금으로 쾌척했고, 덕분에 상해에서 폭탄 16개 제조용의 폭약 및 부속품, 권총 2정, 탄환 100발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시험제조한 폭탄 3개와 나머지 재료 및 무기류 전부를 국내로 밀송하였다. 곡식 화물로 위장하여 안동현에서 탁송된 물건은 밀양의 동지 집과 경남 창원군 진영역 부근의 한 농가에 나누어 숨겼다. 아울러 단원 대부분이 밀입국해 서울의 북촌 일대 중심으로 은신 대기하였다. 이종암은 이때 입국하지 않고 김원봉 · 강세우(姜世宇)와 함께 상해에 남았다. 출옥 후 임시정부 재무부 위원이 되어있는 구영필로부터 7천원을 되돌려 받는 문제였던 것 같다.

불행히도 6월 중순부터 밀파단원 다수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속속 붙잡혀갔다. 누군가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의 김태석(金泰錫) 경부에게 거사계획을 밀고하고, 무기류는 핑계를 대어 내주지 말도록 보관책임자에게 교사한 때문이었다. 거사 결행을 독촉했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자 김원봉의 요청으로 이종암이 상황파악과 실행재촉을 위해 상해를 떠났다. 7월 중순에 밀입국해 단원 다수의 피체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종암은 무기류의 인계를 보관책임자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피신 중인 일부 단원들을 규합해 본인이 거사를 실행하겠다는 의사 표시와 함께였다. 하지만 보관책임자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종암은 김상윤과 함께 경남 밀양군 초동면의 야산지대 농가에 숨어 지내면서 다른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김상윤의 동화학교 동창생 최수봉(崔壽鳳)을 소개받고 만나, 투탄거사를 제의하여 승낙 받았다. 이에 폭탄제조기를 갖고 있던 밀양의 청년지사 고인덕(高仁德)의 협조로 폭탄 2개를 만들어 최수봉에게 건네주었고, 최수봉이 12월 27일에 밀양경찰서로 진입해 투탄거사를 성공시켰다. 그런 후 이종암은 서울로 가서 김한(金翰)의 도움으로 은신해 지내다 1921년 12월 중국으로 탈출하여 북경의 의열단 본부로 합류했다.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상해를 방문하던 날인 1922년 3월 28일, 황포탄 부두에서 의열단의 암살거사가 감행되었다. 다나카는 1920년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일본군이 간도에서 벌인 ‘경신참변’때의 육군대신이었다. 이 거사에 이종암이 자원하여 제3선의 투탄저격수로 나섰다. 간도 출신의 명사수 오성륜(吳成崙)이 제1선을 맡고, 전년도 9월의 조선총독부 청사 진입 투탄거사를 멋지게 수행해낸 김익상(金益相)이 제2선을 맡았는데, 두 단원의 연발사격 총탄이 불행히도 빗맞고 투척된 폭탄은 불발하고 말았다. 이종암이 던진 폭탄은 다나카의 승용차 앞바퀴를 맞췄으나 역시 불발하여, 다나카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고, 이종암만 군중 사이로 숨어들어 체포를 면하였다.

얼마 후 단행된 의열단의 조직정비 때 이종암은 최고지도부 격인 5인 ‘기밀부’의 일원이 되었다. 1923년 말에는 국내 대중봉기를 촉발할 거사계획의 실행 요원으로 선정되었는데, 먼저 떠난 단원들이 연이어 체포되니 특파가 중지되면서 들어오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어머니의 성을 따서 ‘양건호’ 또는 ‘양주평’이라는 가명을 만들어 썼다. 그 후 구영필의 농장이 크게 조성되어 있는 북만주의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지내다 1925년 7월에 밀입국했다. 일본 도쿄로 건너가 폭탄거사를 결행키로 마음먹고, 폭탄 2개, 권총 1정, 탄환 50발, 「조선혁명선언」 등사본 100매를 휴대하였다.

의열단의 거사용 무기들

의열단의 거사용 무기들 ⓒ동아일보 1923.4.12

입국 후 이종암은 몇몇 동지들의 협조에 힘입어 사업권 제공을 반대급부로 하는 5천 원씩의 제공을 두 명의 지인에게서 약속받았다. 현금이 마련되면 받기로 하고 달성군 노곡동의 한 산장에 은신하여 기다리던 중인 이종암은 1925년 11월 5일, 경북경찰부 고등경찰과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이종암이 만났거나 연락 중이던 동지 11명도 줄줄이 붙잡혀가면서, 이른바 ‘경북 의열단사건’이 되었다. 경북경찰부의 정보 · 수사 보고서에 이종암의 밀입국 정보가 10월 20일경에 들어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경찰과 검사국에서 혹독한 신문을 당한 끝에 이종암은 1918년 이후의 행적을 죄다 진술하게 되었다. 그동안 일제 당국이 모르고 있던 사실이나 잘못 알려져 있던 내용들이 그 진술을 통해 모두 밝혀지고 보정도 되었다. 1926년 11월 예심이 종결되고서야 경찰이 사건 전모를 공개하니, 잇따라 신문보도가 나오는 중에 놀라운 내용들이 지면을 채웠다. 검사는 이종암을 의열단의 ‘부장(副將)’ 즉 부단장으로 지칭하면서 (다나카)살인미수,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정치범 처벌에 관한 규칙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13년형을 언도하였다.

대전형무소에 갇힌 이종암은 감옥 환경이 극악한데다 고문후유증까지 더해지면서 지병이던 각기병에 위장병 · 폐병 · 인후병까지 더해져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병세가 매우 악화되니 1930년 5월 19일에 가출옥 되었으나, 열흘 만인 5월 29일 대구의 친형 집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이종암의 값진 희생과 빛나는 공훈이 오래도록 기려지게 하였다.

이종암 사진

이종암 사진

백절불굴의 의열지사 이강훈

이강훈

이강훈

이강훈은 1903년 6월 13일, 강원도 김화군 김화읍 샘골[泉洞]의 유지 이기원(李起源)과 재령 강(康)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1918년에 결혼했다. ‘청구반도의(또는 청천백일 하의) 우레’라는 뜻의 ‘청뢰(靑雷)’라는 호를 지어 썼다.

1919년 3월 12일, 거주지이던 김화군 서면의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고 주재소 헌병들에게 붙잡혀갔다가 간신히 풀려났다. 상해의 임시정부 소식을 듣고 동경하던 끝에 1920년 2월 집을 떠났다. 우선은 친지가 있는 북간도로 가서 일시 기류하던 중에 만난 노백린(盧伯麟)의 소개장을 받고 상해로 갔다.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를 찾아가 환대 받고 이동휘의 거처에서 기식하며 잡무를 도왔다.

1921년 봄에 이동휘가 사직하고 러시아로 가버리니, 이강훈도 북간도로 돌아가 용정의 사범학교를 다녔다. 1924년 모친상을 당해 일시 귀향했다가 경찰에 붙잡혀갔고, 철원지청 검사국의 엄한 취조를 받은 후 불기소로 풀려났다. 이후 섣달 그믐날에 원산행 기차를 타고 탈출해 북간도로 돌아갔다.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 군사위원장 김좌진(金佐鎭)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가, 함경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며 전갈하고 군자금을 모집해 귀임하였다. 1926년 여름에 안도현으로 가서 신창학교를 설립하고 2년간 교사로 일하였다. 1929년 1월에 밀산으로 가서 기사청년회(己巳靑年會)를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에 재만(在滿)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을 주도했던 김종진(金宗鎭)의 내방을 받고 그 성원이 되었다. 뒤이어 이 연맹과 신민부의 결합으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가 결성되니 참여했다. 1929년 겨울 해림으로 가서 김좌진과 재회하고, 북간도를 거쳐 본국에 다녀오라는 밀명을 받아 1930년 1월 이달(李達)과 함께 길을 떠났다. 중도에 김좌진 피살 소식이 들려오니 급히 돌아가 장례를 치르고, 구강포의 동신학교 교무를 맡아 2년여 전담하였다.

윤봉길 의거에 감명받고 1932년 7월에 구강포를 떠나 1933년 2월 초에 상해에 도착했다. 김구(金九)를 찾아가 만나보고 지도받음을 기대했는데, 가보니 거길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시절의 인연을 따라 프랑스조계 복이리로 정원방(亭元坊)의 아나키스트 집거지로 가서 이달 · 백정기(白貞基) · 엄순봉 등 8인의 동지와 합숙하며 지냈다. 앞서 1930년 4월 상해에서 류기석(柳基錫) · 류자명(柳子明) 등의 주도로 아나키스트 비밀결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이 결성된 바 있다.

상해 남경로(1924)

상해 남경로(1924)

1931년 12월 초에는 자금 또는 정보를 제공해줄 만한 4~5명의 중국인 · 일본인 아나키스트와 청년연맹과의 합작 제휴로 ‘항일구국연맹’이 결성되었는데, ‘파괴와 숙청의 행동조직’을 강조하여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원방의 동지 전원이 두 조직에 가입해 있었고, 이강훈도 가입하여 맹원이 되었다. 이강훈이 보건대 흑색공포단은 상해에서 한인애국단이 수행했던 임무를 이어받고 있었으며, 일제 타격의 방법론에서도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김구의 민족노선과 달리 국제노선을 중시한다는 차이점은 있었다.

이강훈의 정원방 합숙생활이 채 한 달도 안 된 때인 3월 5일, 인근에 거주하면서 연맹의 사무를 전담하고 있던 원심창(元心昌)이 맹원들을 찾아와, ‘오키(沖)’로 불리는 일본인 아나키스트에게서 들었다는 ‘중요정보’를 전해주었다. 주중(駐中)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조만간 정무협의차 일시 귀국하는데, 그 전에 공동조계 홍구의 문남사로에 위치한 일본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중국정부 요인과 은밀히 접선하였다.

상해총영사관(1924 아리요시 아키라 총영사)

상해총영사관(1924 아리요시 아키라 총영사)

아리요시는 1932년의 5.15사건으로 수상 이누카이(犬養)가 피살된 뒤 실권을 잡은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의 충복인데, 거금 4천만 엔(2천만 달러 상당)의 기밀비를 동원하여 근간의 ‘산해관 · 열하 사태’로 인한 중국정부의 강경태세를 누그러뜨리고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중단시키며 한인들의 항일운동도 압박 · 저지토록 할 공작을 획책 중이라 하였다. 그 풍설을 곁들이면서 원심창이 아리요시의 동정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고 설명했다.

모여 있던 10인의 청년연맹원들은 이참에 아리요시를 암살 제거해버리자고 뜻을 모았다. 곧바로 거사계획이 밀의될 때 이강훈이 ‘1인 1살’원칙과 ‘1살 만생(萬生)’의 대의에 따라 단독거사를 결행하겠다면서 먼저 나섰다. 그러자 백정기가 이번의 거사 결행은 자기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니, 격론 끝에 결국은 2인 공동수행으로 결정되었다. 육삼정에서 한 블럭 건너편 무창로의 중국음식점 송강춘(松江春)에서 두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가 아리요시가 연회를 끝내고 나오는 기미가 보이면 이강훈이 달려 나가 고성능 수류탄을 던져 폭사시키고 백정기는 수류탄과 권총을 사용해 추격대에 맞서기로 계획이 세워졌다. 원심창이 송강춘까지의 길 안내와 피신용 자동차 운전을 맡고 오키도 외곽지원 역할을 일부 맡기로 하였다. 그래서 원심창이 오키에게 모든 계획을 그때그때 알려주고, 심지어 사진까지 주었다.

아리요시의 밀회일이 3월 17일로 결정되었다는 추가정보가 들어온 후, 당일 저녁에 세 사람이 공동조계로 들어가 송강춘에 다다랐다. 먼저 들어간 원심창을 따라 백정기와 이강훈이 2층으로 올라가는데 일본영사관원 10여 명과 영국경찰 수 명이 나타나 고함치며 총을 들이댔다. 세 사람은 미리 대기 중이었고, 3인은 꼼짝없이 체포되는 수밖에 없었다. ‘육삼정 의거’로 불려왔지만 실은 그곳에 이르기도 전에 ‘암살 미수’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영사관에서 오키를 밀정으로 이용해 상해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벌인 역공작의 결과였음이 근래의 한 연구에서 자세히 밝혀졌다.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끌려간 3인은 엄중취조를 받던 중에 다음과 같이 호언하였다. “한 인간으로서 생각할 때 아리요시 개인에게는 하등의 감정이 없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악이며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리요시 공사는 일본제국주의의 대표자이니, 아리요시 공사를 암살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행위이다. 우리 무정부주의자의 당연한 길이고 의무이다.” 사법영사의 예심 종결과 동시에 재판에 회부된 3인은 7월 5일 일본 나가사키의 우라카미 구치소로 이송되어갔다. 재판정에서 백정기가 본인과 원심창이 주도한 것처럼 진술하고 구치감에서는 그것을 우리말 노래인 양 불러대며 원심창에게 일러주니 후자도 동조하여, 백정기와 원심창은 주범, 이강훈은 종범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비공개 재판에서 전2자는 무기징역, 이강훈은 15년형을 언도 받았는데, 백정기는 지병이던 폐결핵 악화로 1934년 5월 22일 옥중 순국하였다. 수형 중에 이강훈은 일왕의 득남 자축 ‘은사’로 형기의 1/4이 감형되었고, 1940년의 대사령(大赦令)으로 잔형의 1/2이 다시 감형되었다. 그래서 1942년 7월 25일로 형 만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일제 당국은 이강훈의 열렬한 독립사상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아채고, 석방 대신 예방구금에 처하였다. 그래서 이강훈은 곧장 규슈 남단의 구마모토 감옥에서 도쿄의 도요다마 예방구금소로 이송되었다.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고 10월에 출옥한 이강훈은 12월에 귀국해 백정기 · 윤봉길 · 이봉창 3의사의 유해 발굴과 그 봉환 문제를 김구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상의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돌아가 3의사의 유해를 모두 찾아낸 후, 1946년 4월에 유해를 모시고 귀국했다. 그 결과, 7월 6일 합동장례를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 다시 일본으로 간 이강훈은 1950년 8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을 결성하고 활동하다 1960년 영주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여 이강훈의 다대한 공훈을 기렸다.

출옥 후 이강훈 지사(1946)

출옥 후 이강훈 지사(1946)

아나키스트 의열투쟁의 선봉장 엄순봉

엄순봉은 1906년 1월 26일 경상북도 영양군 대천동 옥산마을에서 농민 엄덕진과 권인녀 부부의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호적명은 형순(亨淳)이고 별호는 추수(秋水)였다. 보통학교도 다니지 못할 만큼 가세가 빈한했지만, 그늘 없이 순박하면서도 의협심 강한 성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집안 농사일을 계속해서 돕고 짓다가 18세쯤에 외가 친척의 서당에 들어가 2년정도 수학하였다.

1925년 9월경에 압록강 너머의 남만주로 건너갔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곤 했다. 그러다 백두산 밑 안도현에 이르렀을 때 한인학교 교원인 이강훈을 알게 되었고, 이강훈의 소개장을 받아 북만주의 해림으로 갔다. 거기서 신민부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군사위원장 김좌진이 엄순봉의 인품과 도량에 감탄하여 청년참모의 일원으로 대우하고 아꼈다.

1929년 7월 해림에서 김종진 · 이달 등의 주도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조직되고, 뒤이어 신민부가 김좌진과 결합해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엄순봉도 두 조직에 다 참여하고, 총연합회의 청년부 차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0~31년 사이에 김좌진 · 김종진 · 김야운(金野雲) · 이준근(李俊根)이 공산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진영의 반대파에 의해 잇따라 암살되면서 총연합회 조직이 급속도로 약화되고 활동기반도 상실되어 갔다. 게다가 9 · 18사변 발발과 더불어 만주지역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이에 엄순봉은 먼저 떠난 백정기 · 정화암(鄭華岩)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뒤좇아 1931년 10월 남쪽을 향해 떠났다. 상해로 간 엄순봉은 외곽지 남당(南塘)에 정착하고 생활기반을 잡아갔다. 그러면서 인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인 류자명과 교유하고, 류자명의 인도를 통해 아나키즘 이론을 깊이 학습하고 수용해 갔다. 엄순봉이 이해한 아나키즘의 주지는 개인의 자유가 절대로 존중됨과 아울러 사회정의도 이루어지도록 모든 계급질서를 타파하고 민중의 자유연합 사회를 건설하자 함이었다. 그런 연관에서 엄순봉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이하 ‘남한청맹’)과 항일구국연맹(흑색공포단)에 기꺼이 가입하였다.

1933년 2월 상해에 도착한 이강훈이 프랑스 조계 복이리로 정원방 6호 정해리(鄭海理)의 집 2층에 마련된 남한청맹원들의 집거지에 합류할 무렵에 엄순봉도 남당을 떠나 그리로 갔다. 거기서 이강훈과 해후하고 여러 동지들과 합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3월 초부터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암살거사가 발의되고 계획이 세워져 추진되는 과정에 동참했고, 거사 실행자로 떠나는 세 동지와의 석별연에도 참석했다.

상해조계 사진

상해조계 사진

상해조계 사진2

상해조계 사진2

상해 일본 조계지역

상해 일본 조계지역 ⓒ독립기념관

이후 ‘육삼정 의거’가 실패로 끝났고 남한청맹은 상해 한인사회 내부의 적인 악성 친일분자와 직업적 밀정, 사리사욕에 눈먼 밀고자 등을 처단, 척결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우선 일본영사관의 밀정 노릇을 하는 이종홍(李鍾洪)을 처단키로 결의하고 1933년 5월에 실행하는데, 여기에 엄순봉이 참여한다. 안경근(安敬根)이 남상의 한 중국인 동지의 집으로 이종홍을 유인해오니, 오면직(吳冕稷) · 이달 · 이용준(李容俊)과 엄순봉이 삼끈으로 결박하고 엄히 문책해 모든 죄상을 자백받고 교살(絞殺) 매장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독립운동에 방해물이 되는 친일분자 제거에 나서는데, 그 시범사례가 된 것이 1933년 8월 1일의 옥관빈(玉觀彬) 저격 처단이었다. 상해지역의 재계 · 언론계 · 불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 실업가로서 옥관빈은 일제 관헌과 내통하여 거액의 군용품을 기부하고 반대급부의 지원을 받아 축재하였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을 비방하고 중국의 군사 · 정치까지 은밀히 정탐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이에 김구 · 안공근(安恭根) · 정화암 3자가 대좌하여 옥관빈 제거에 합의하고 남한청맹에 실행을 맡기면서 엄순봉이 직접 거사자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옥관빈이 종종 출입하는 사촌형 옥성빈(玉成彬)의 집 맞은편 중국인 집 2층에서 오면직이 열흘간 잠복하며 기다리다 8월 1일 밤 “드디어 출현했다”고 알려왔다. 그러자 엄순봉이 급거 출동하여, 사통(私通)을 행하고 후문으로 나오는 옥관빈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1935년 봄에 벌어진 이용로(李容魯) 암살사건도 악성 친일분자 처단활동의 일환이었다. 이용로가 일제의 끄나풀 조직과도 같은 재상해조선인거류민회의 부회장이 되더니, 일본영사관과 결탁하여 재류 한인들 모두 민회에 가입토록 압박하고, 독립운동자들의 거처와 동정 등을 낱낱이 영사관에 밀보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에 정화암이 엄순봉 · 이달 · 이용준에게 이용로 처단 응징을 역설하니 모두 찬동하고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두 명이 실행키로 하여 엄순봉이 자원하였고, 중국어에 능한 이규호(李圭虎)에게 길 안내와 망보는 역할을 제의해 승낙 받았다.

3월 25일 아침에 순양리 아지트를 나온 두 사람은 공동조계 유신리로 갔다. 이규호는 민회 사무실 인근의 야채시장 광장에서 망을 보고, 엄순봉이 민회 사무실 2층으로 돌입하여 취침 중인 이용로에게 권총 2발을 쏘아 뒷머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려는데, 이용로의 아내 박성신(朴聖信)과 처남 박숭복(朴崇福)이 붙잡아 식도로 내리쳐 부상을 입히고 고성을 질러댔다. 겨우 뿌리친 엄순봉이 큰길을 향해 내달렸으나, 고함소리에 달려온 중국 순경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용로는 그날 밤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본영사관 경찰로 넘겨져 모진 심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된 엄순봉은 종로경찰서의 취조를 거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치안유지법 위반 외의 다중 죄목으로 유죄 선고와 함께 사형을 언도하였다. 즉시 항소했으나 복심법원에서 기각되니 엄순봉은 관선변호사의 권고대로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형량 감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심한 고문에 의한 허위조서 작성과 재판부의 사실 오인, 이용로 암살의 동기 및 행동내용에 관한 오판에 항변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상고 또한 기각되어 사형판결이 확정되었다.

1938년 4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엄순봉은 3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형장으로 나가면서도 엄순봉은 당황하거나 초조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최후에는 의연히 “대한 만세”와 “무정부주의 만세”를 삼창했다는 형리의 전언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엄순봉 의사의 특출한 독립운동 행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엄순봉 기적비

엄순봉 기적비

1920~30년대 한인 의열투쟁의 의의

살펴본 대로 이종암 지사는 1919년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고 1920년대 의열투쟁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이강훈 지사는 약관 10대 때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북간도와 상해 방면에서 여러 경험을 쌓고 교육계몽운동과 주민자치 부문에 주력하다 운동정세의 급변을 자각했고, 상해로 가서 아나키스트 대오에 합류해 ‘직접행동’의 최전선으로 자진해 나아간 이였다. 그리고 엄순봉 지사는 농사를 짓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의 장으로 진입했고 1930년대 초에 상해로 옮겨가서는 밀정과 친일분자를 응징하는 아나키스트 활동의 선봉에 섰다. 이강훈과 엄순봉이 취해간 ‘아나키스트 직접행동’의 대상은 이종암의 의열단이 지목했던 ‘7가살’처럼 일제 요인과 친일-반민족 패류(悖類)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거사 시도와 활동은 반제투쟁과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의미가 컸고, 확실히 의열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의열투쟁에는 당사자의 희생이 자주 뒤따르곤 했다. 성사되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거나 중도에 좌절된 거사 시도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실패’로 단언할 수만은 없다. 성공한 거사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실패했거나 좌절되었을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가 찾고 배울 것은 많다. 성패를 불고(不顧)하고 의열투쟁의 전선에 나선 의사들은 아나키즘적 논법으로 말해보면 ‘행동에 의한 선전’의 선봉대였다. 동족 내의 불의한 존재를 응징하고 숙청하였으며, 일제의 흉계를 폭로하고 그 획책하는 바를 저지하였다.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극대로 표출해내며, 주체적 민족운동의 기세를 드높여 일제에 경종을 울리는 등 모두가 ‘행동에 의한 선전 · 격동’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행동 속에서 아나키스트 의열투사들은 자유와 정의를 향한 끝없는 집념, 불굴의 투쟁의지, 뜨거운 동지애와 고결한 희생정신을 나타내 보여준 것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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