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중

건중

[ 建中 ]

요약 중국 당나라 덕종 때의 연호(780~783년).

중국 당나라 제12대 황제인 덕종(德宗) 이괄(李适, 재위 779〜805) 때의 첫 번째 연호이다. 780년 음력 1월부터 783년까지 4년 동안 사용되었다.

덕종은 779년( 14) 6월 10일(음력 5월 21일) 아버지 (代宗)이 죽자,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새 임금이 즉위한 이듬해부터 새 연호를 사용하는 (踰年稱元法)에 따라 780년 음력 1월 연호를 ‘대력(大曆)’에서 ‘건중(建中)’으로 바꾸고, 그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건중 연간인 780년(건중 1)에 덕종은 재상 양염(楊炎)의 건의를 받아들여 ‘(租庸調)’의 조세제도를 폐지하고 ‘(兩稅法)’을 실시하였다. 전납(錢納)을 원칙으로 호세(戸稅)와 지세(地稅)를 징수하고, 상인들에게도 징세를 한 양세법을 실시하면서 당나라는 국가 재정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각지의 절도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면서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은 더욱 확대되었다. 781년(건중 2)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이보신(李寶臣)이 죽자 그의 아들인 이유악(李惟岳)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할 것을 요청했으나 덕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유악은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열(田悅), 치청절도사(淄青節度使) 이정기(李正己),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 양숭의(梁崇義)와 함께 이른바 ‘사진(四鎭)의 난’이라고 불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 전열은 스스로 위왕(魏王)이라고 칭하고, 유계절도사(幽薊節度使) 주도(朱滔)는 기왕(冀王)이라고 칭하는 등 각지의 절도사들은 당나라로부터 자립해 할거하였다.

783년(건중 4)에는 경원(涇原) 지역의 군병들이 일으킨 이른바 ‘경원병란(涇原兵亂)’이 일어나 장안이 함락되고 덕종이 산시[陝西]의 봉천(奉天)으로 피신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경원의 군병들에게 옹립된 주차(朱泚)는 황제라고 칭하며 국호를 진(秦), 연호를 ‘응천(應天)’이라 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덕종이 피신해 있는 봉천을 포위했으나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이회광(李懷光)과 신책군(神策軍) 장수 이성(李晟)에게 패해 경주(涇州)로 달아났다가 살해되었다.

주차의 난이 진압되자 장안으로 환궁한 덕종은 784년 음력 1월 대사면을 행하며,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興元)’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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