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분지전투

해안분지전투

[ Battle of Haean Basin , 亥安盆地戰鬪 ]

요약 한국전쟁 때인 1951년 8월부터 10월까지 강원도 양구의 해안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1951년 8월 31일부터 10월 14일까지 강원도 양구의 해안면(亥安面) 일대의 고지들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현재 양구군의 동면 월운리에는 펀치볼지구전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해안면 만대리에는 가칠봉전투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배경과 원인

1950년 9월 18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말에는 압록강 유역까지 진격해갔다. 하지만 중국군이 개입하자 퇴각하기 시작해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전열을 정비한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에 나서 3월 14일 서울을 탈환했고, 5월 무렵에는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처럼 전쟁이 장기화할 우려가 커지자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협상은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그러자 유엔군 총사령관인 리지웨이(Matthew Ridgway)는 군사력으로 압박을 가해서 협상을 강요하려는 전략을 세웠고, 미 제8군 사령관인 밴 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중장은 7월 21일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양구의 해안분지 일대를 공격하게 했다. 미 제2사단이 7월 27일 해안분지 서쪽의 (大愚山, 1179m)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으나, 장마 때문에 공격은 중단되었다.

8월 중순이 되어 장마가 끝나자 미 제10군단의 군단장인 바이어스(Clovis E Byers) 소장은 해안분지 북쪽의 고지들에 작전통제선을 설정하고 다시 각 사단에 공격을 명령했다. 8월 18일부터 국군 제7사단은 백석산(白石山, 1142m) 기슭인 양구 방산면 송현리의 554고지·901고지 공격에 나섰으며,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은 이른바 ‘피의 능선’이라고 불리는 983고지·940고지·773고지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국군 제8사단은 해안분지 동북쪽인 인제군 서화면 노전평(蘆田坪)의 1031고지·965고지 공격에 나섰다.

국군 제7사단은 8월 26일 554고지를 점령했고, 국군 제8사단도 1주일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노전평전투에서 승리해 1031고지와 965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병력이 투입된 는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미 제10군단은 북한군의 병력과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8월 29일 예비부대로 편성되어 있던 미 해병 제1사단을 해안분지 북쪽의 고지 공격에 새롭게 투입했다.

펀치볼전투

화채그릇처럼 움푹 파인 모양을 하고 있어서 펀치볼(Punch Bowl)이라고도 불리는 해안분지는 1천m가 넘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당시 북한군 제3군단에 속한 제1사단은 해안분지 북쪽의 924고지와 1026고지를 각각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라고 부르면서 방어진지를 공고히 구축하고 있었다. 이 고지들에 대한 공격 임무를 맡은 미 해병 제1사단은 당시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국군 해병 제1연대로 하여금 924고지와 1026고지를 공격하게 했으며, 미 해병 제7연대에게는 해안분지 동북쪽의 702고지와 660고지를 공격하게 했다.

8월 31일 공격을 시작한 국군 해병 제1연대는 9월 2일 924고지를 점령했으며, 9월 3일에는 1026고지도 점령했다. 미 해병 제7연대도 9월 1일 702고지를 점령했으며, 9월 2일에는 660고지도 확보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9월 8일 다시 전방의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 9월 20일까지 749고지와 812고지 등을 추가로 점령했다. 이로써 미 제10군단은 작전의 목표를 이루어 해안분지를 완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400여 명의 전사자와 1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북한군 2,700여 명을 사살하고 55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국군 해병 제1연대도 100여 명의 전사자와 3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38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4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가칠봉전투

해안분지 북쪽의 924고지·1026고지 등이 점령되자 해안분지 서쪽의 피의 능선을 방어하던 북한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고립될 것을 우려해 이른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고 불리는 방산면 문등리와 동면 사태리 일대의 894고지·931고지·851고지로 퇴각했다. 그러자 미 제10군단 군단장인 바이어스 소장은 미 제2사단에게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게 했으며, 국군 제5사단에게는 해안분지 서쪽의 가칠봉(加七峰, 1,242m)을 공격하게 했다.

국군 제5사단은 제27연대 병력을 앞세워 9월 4일 가칠봉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은 가칠봉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북한군이 제27사단·제12사단의 4개 연대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 반격을 가해오면서 다시 빼앗겼다. 그 뒤 가칠봉에서는 10월 14일까지 40여 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여섯 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 끝에 국군은 가칠봉과 인근의 고지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칠봉전투에서 패하면서 북한군은 사태리 방면의 쌍두령(雙頭嶺)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5사단은 600여 명이 전사하고 4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북한군 1천여 명을 사살하고 25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결과와 영향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 병력을 동원해 북한군 제5군단이 지키던 백석산을 공격해 10월 1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패퇴시키고 양구 북방의 고지를 확보해 취약했던 이 지역의 방어선을 효율적으로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중동부전선에서 전력의 우위를 입증하면서 공산군에 협상을 압박하는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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