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우드헐

빅토리아 우드헐

[ Victoria Woodhull ]

요약 19세기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었으며, 여성으로서 미국 최초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출생-사망 1838.9.23 ~ 1927.6.9
국적 미국
활동분야 정치, 사회운동
출생지 미국 오하이오
주요수상 잉글랜드 우스터셔(Worcestershire)

1838년 (Licking County)의 시골 마을에서 10남매 중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의 이름은 빅토리아 캘리포니아 클래플린(Victoria California Claflin)이었다. 11살까지 3년 정도의 정규교육을 받았으며, 14살이 되었을 때 의사였던 28살의 캐닝 우드헐(Canning Woodhull)과 결혼했다. 두 자녀가 태어난 후 그들은 이혼했고, 1866년 제임스 하비 블라드(James Harvey Blood)와 재혼했다.

활동

그녀는 자유연애(free love)에 대해 지지하였는데, 이는 첫 남편인 캐닝의 외도를 알게된 후로 추정된다. 19세기 당시 미국에서 결혼한 여성들은 애정이 없다 하더라도 결혼생활을 중단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혼은 법에 의해 제한되었고, 사회적으로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혼한 여성들은 오명을 쓰게 되고, 종종 사회에 의해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여성들이 결혼 생활을 그만둘 수 있는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계기로 그녀는 자유연애를 포함해 사회개혁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0년 여동생 테네시(Tennesse Claflin)와 함께 우드헐 & 클래플린 위클리(Woodhull and Claflin's Weekly)를 창간했다. 당시 매우 급진적이었던 이 출판물에서 두 사람은 여성의 참정권, 산아제한, 자유연애 등을 포함하여 사회개혁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또한 이 잡지에서 칼 마르크스의 《 The Communist Manifesto》의 첫 번째 영문 번역본을 출판했다.

그녀는 남성들로 가득찬 국가 정치 시스템에 개입하는 방법을 배웠고, 하원 사법 위원회(House Judiciary Committee)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 발언하였다. 그녀는 수정헌법 제14조 및 15조가 모든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미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여성 인권 운동가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후, 그녀는 선거운동의 리더십 그룹에 합류하였고,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 전례 없는 대중적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직접 의회에 청원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대선 출마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든 일 외에도 뉴욕에서 지식인 클럽을 운영하고, 월스트리트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주식중개소를 개소하기도 했던 그녀는 1872년 소수정당인 '평등권당(Equal Rights Party)'의 후보로 남녀평등을 지지하며 대선에 출마했다. 그녀는 “사회와 가정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며 대선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단 한 명의 선거인도 확보하지 못하고 참패했다.

평가

그녀의 대통령 선거 출마는 여성 인권운동 역사의 차원에서, 그리고 의 대선 출마보다 훨씬 이전 시대에 기록된 미국 내 여성의 정치 참여라는 측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참조항목

,

카테고리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