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개

정개

[ 正開 ]

요약 후삼국시대 때에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사용한 연호로 901년부터 쓰기 시작해 후백제가 멸망한 936년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가 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남원 (實相寺)에 있는 편운화상(片雲和尙)의 부도에 “실상사 창건조인 홍척화상의 제자로 안봉사를 창건한 편운화상의 부도, 정개 10년 경오년에 세운다(創祖洪陟弟子 安峰創祖 片雲和尙浮屠 正開十年庚午歲建)”는 명문이 전해진다. 당시 남원은 후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정개(正開)는 후백제가 사용한 연호로 해석된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정개 10년인 경오년(庚午年)은 서기 910년을 가리키므로, 정개 원년(元年)은 신유년(辛酉年)인 901년이다. 《삼국사기》에는 이 892년(진성왕 6)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차지하고 스스로를 ‘한남군(漢南郡) 개국공(開國公)’이라고 칭했으며, 900년(효공왕 4)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로 도읍을 정해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고 칭하면서 관직을 정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후백제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개(正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연호가 언제까지 사용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후백제가 멸망한 936년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후백제가 사용한 정개(正開)라는 연호와 한자는 다르지만, 가 세운 도 914년부터 918년까지 정개(政開)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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