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준구미해전

화준구미해전

[ 花樽龜尾海戰 ]

요약 임진왜란 때인 1592년 10월 부산의 다대포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 등이 이끈 전라좌도(全羅左道)·전라우도(全羅右道)·경상우도(慶尙右道)의 수군이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의 화손대(花孫臺) 부근 화준구미(花樽龜尾)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이다. ‘구미’는 길게 뻗은 곶이 후미지게 휘어진 지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등에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배경과 원인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함대는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하여 1592년 6월 16일 을 시작으로 8월 14일 까지 일본군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9월 6일부터는 일본군이 침략의 거점으로 삼고 있는 (釜山浦)를 공격하기 위해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의 부대와 함께 함대를 편성해 합동 훈련을 하였다.

부산포 공격을 위한 준비를 마친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의 함대는 9월 29일 여수를 출발해서 그날 오후 남해도(南海島) 서북단의 관음포(觀音浦)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경남 통영의 사량도(蛇梁島) 앞바다에서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의 함대와 합류해서 함께 당포(唐浦)로 이동했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가 이끄는 8천여 명의 수군과 470여 척의 전함을 부산포 일대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수군은 3도의 병력이 모두 집결한 상태에서도 전선(戰船) 74척과 협선(挾船) 92척의 규모에 지나지 않아 병력과 선박의 수가 모두 열세였다.

발발과 전개과정

거제도 인근의 (七川島)를 거쳐서 진해의 원포(院浦)에 도착한 조선 수군은 해안 지역을 수색하며 일본군의 동향을 탐지했다. 그러면서 고성·진해·창원 일대의 일본군이 모두 부산 의 (沒雲臺) 바깥으로 이동해서 집결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0월 3일 가덕도의 천성포(天城浦)에 정박한 조선 수군은 다음날 김해와 양산 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낙동강 하구의 장림포(長林浦)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타고 있는 선박 여섯 척을 발견해 모두 파괴했다.

10월 5일 새벽 부산포를 향해 이동하던 조선 수군은 화준구미에서 일본군의 대형 선박 5척을 발견하고 모두 침몰시켰다. 그리고 다대포 앞바다에서 8척, 서평포(西平浦) 앞바다에서 9척, 절영도(絶影島)에서 2척의 일본군 선박을 잇달아 침몰시켰다.

결과와 영향

곧바로 부산포 앞바다로 이동해간 조선 수군은 일본군이 육지로 달아나 반격을 가해오는 사이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 선박을 공격해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두고 물러났다. 3도의 수군이 연합해서 벌인 작전이 큰 성과를 거두자 조정은 삼도(三道水軍統制使) 직위를 새로 만들어 이순신에게 맡게 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 수군은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에서 이키 섬[壹岐島]과 쓰시마 섬[對馬島]을 거쳐 부산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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