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옹

염옹

[ 冉雍 , Rǎn Yōng ]

요약 공자의 제자
염옹의 초상화

염옹의 초상화

시대 춘추시대 노(魯)나라
출생 - 사망 BC.522년 ~ 미상
이칭 중궁(仲弓)

1. 염씨 삼형제 중 차남

노나라 도1) 출신으로, 자는 중궁(仲弓)이다. 춘추시대 말기 공자의 제자로 의 열 번째 아들 염계재(冉季載)의 후예다. 하택(菏澤, 지금의 허쩌시)의 양지바른 곳에 거주했고, ‘이우씨(犁牛氏)’로 불렸다.

『염씨가보(冉氏族譜)』에 따르면, 염옹의 부친 염리(冉離)가 안씨(顔氏)를 아내로 맞아 맏아들 염경을 낳았는데 자가 백우(伯牛)이고, 차남으로 염옹을 낳았는데 자가 중궁이다. 안씨가 죽은 후 공서씨(公西氏)를 아내로 맞아 염구를 낳았는데 자가 자유(子有)였으며, 염유(冉有), 염자(冉子)라고도 불렸다.

훗날 공서씨는 삼형제를 공자에게 맡겨 공부를 시켰다. 염씨 삼형제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공자의 격려를 받으며 학문적으로 성공하여 ‘일문삼현(一門三賢)’으로 일컬어졌고, 모두 공자의 10대 제자를 가리키는 에 이름을 올렸다.

2. 덕행으로 공자의 신임을 얻다

삼형제 중 둘째인 염옹은 어질었지만 말은 잘하지 못했다. 공자는 그의 덕행을 거론하며 “염옹은 임금을 시킬 만하다.”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제자 중 (안연)와 더불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같은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자공(단목사)도 “만약 덕이 있는 임금을 만나 높은 지위에 오른다면 그 이름을 실추시키지 않을 것이다. 가난해도 빈객이 된 듯이 당당하고, 아래의 신하를 부릴 때 함부로 대하지 않고 그 힘을 빌리듯이 하며, 노한 마음을 제 삼자에게 옮기지 않고, 남을 심하게 원망하지 않으며, 지난날의 허물을 끄집어내지 않으니, 이것이 염옹의 행실이다.”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3. 『논어』를 편집하다

공자는 임종 전에 제자들 앞에서 “어질구나, 염옹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구나.”라고 칭찬했다. 공자가 죽자 염옹은 그의 도(道)가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 민자건(민손) 등과 함께 『』 120편을 편집했다. 또한 홀로 6편을 편찬하여 『경간집(敬簡集)』이라고 불렀는데, 진시황제의 때 유실되었다.

4. 후대의 추앙

당 (顯宗) 개원(開元) 27년인 739년에 ‘설후(薛侯)’로 추봉되었고, 송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인 1009년에 다시 ‘하비공(下邳公)’으로 추봉되었다. 남송 함순(咸淳) 3년인 1267년에 ‘설공(薛公)’으로 봉해졌고, 가정(嘉靖) 9년인 1530년에 ‘선현염자(先賢冉子)’로 명칭이 바뀌었다.

염옹-선현염자의 초상화

염옹-선현염자의 초상화

5. 관련 유적

사후에 지금의 산둥성 허쩌시 동남쪽 60리 밖에 묻혔고, 다른 두 형제 염경, 염구와 합사(合祠)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논어(論語)』
  •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