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포레

가브리엘 포레

[ Gabriel-Urbain Fauré ]

출생 - 사망 1845년 ~ 1924년
국적 프랑스

스페인과 가까운 남프랑스 아리에주(Ariège)의 교사 집안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나타내 13세 때 니더마이어 음악 학교에 입학하여 화성법과 피아노를 (프랑스)에게 배웠는데, 포레(프랑스)는 그에 의해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폭넓은 음악과 접할 기회를 얻었다. 1865년(20세)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에 종군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 소뵈르(St. Sauveur) 사원을 비롯한 각지 사원의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하면서 작곡을 계속해 갔다. 그 때문에 작곡가로서 주목을 받은 것은 비교적 훗날의 일이며, 1876년(31세) 「바이올린 소나타」 Op.13의 초연에 성공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의 그의 작품에는 「꿈꾸고 나서 Après un rêve」(1865) 등의 가곡이 많았고 화려한 관현악곡이나 오페라가 없으므로 특히 두드러지는 존재는 아니었다. 매우 정확하고 치밀한 그 작풍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애호가도 적지 않았는데, 특히 상류 사회의 살롱에서는 곧잘 작품이 소개되고 있었고 국민음악 협회가 소개에 힘써 준 것도 다행한 일이었다. 1885년(40세)에 아버지를 잃고 다시 2년 후에 어머니를 잃은 포레(프랑스)는, 그 슬픔과 추모를 명작 「레퀴엠 Messe de Requiem」(1888)에 의탁했다. 이 대작 완성 후 일종의 허탈감에 사로잡힌 그는, 베네치아에 가서 창작 의욕을 회복하고 베를렌의 시에 의한 가곡 「5개의 노래 Mélodies de Venise」(1891)를 완성하여 작풍의 새로운 발전과 원숙을 드러냈다.

그의 가곡은 초기 무렵부터 프랑스 낭만파의 고답파 시인의 작품을 가사로 하고 있었는데, 「5개의 노래」 이후 특히 베를렌에 대한 공감을 보여주었으니 「상냥한 노래 La bonne chanson」(1892)와 「감옥 Prison」(1895)은 그것에 대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1896년(51세) 파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가 되고 (프랑스)을 비롯한 많은 영재를 키워 갔다. 다시 1905년에 원장이 되고 (프랑스)와 당디를 평의원으로 맞아들여 교풍의 쇄신을 꾀한 바 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풍은 또다시 변화를 보여, 그때까지의 우미와 서정 대신에 내성적인 엄격함을 간소하면서도 자유로운 형식 속에 나타내게 되었다. 유일한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서정극「페넬로프 Pénélope」(1913)와 가곡집 「환상의 수평선 L'horizon chimerique」(1922)을 포함한 성악곡 외에, 「피아노 5중주곡」(1906)을 비롯한 많은 걸작 기악곡을 쓴 것도 이 시기였다.

1903년경부터 앓아오던 난청은 점점 나빠져 만년에는 거의 청력을 잃고 있었지만 원장 사임 후에도 창작을 계속했으며, 1924년 11월 4일 청빈 속에 79세의 생애를 마쳤다. 포레(프랑스)는 이른바 대작곡가는 아니었지만 일관해서 프랑스적인 감각에 살았으며, 특히 그 만년의 작풍에는 (독일) 후기의 초월적인 정신 세계를 상기시키는 것마저 있다. (프랑스)에 앞서 현대의 프랑스 음악 융성의 기초를 쌓은 귀중한 작곡가로서, 앞으로도 그 존재는 높이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