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르 프랑크

세자르 프랑크

[ César Auguste Jean Guillaume Hubert Franck ]

출생 - 사망 1822년 ~ 1890년
국적 프랑스
주요작품 (교향곡)

벨기에의 독일계 은행가의 가정에서 두 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식을 피아니스트로 키우려했던 아버지의 의지로 형제는 일찍부터 출생지 리에주(Liège)의 음악원에서 배웠다. 1835년(13세) 파리에 나간 세자르는 1837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는데 특히 피아노에는 비범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러나 작곡의 로마상을 지향하고 준비를 시작하자 작곡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아버지에 의해 퇴학당하고 일단 귀국, 그 후 또다시 파리에 돌아갔다. 혁명의 와중에서 결혼한 뒤 1851년(29세)부터는 각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나 학생을 가르쳐 생계를 해결하는 한편, 적은 시간을 쪼개어 작곡에 힘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당시의 경박한 음악 취미에 영합할 수 없었던 프랑크(프랑스)는 오르간을 통해 오로지 J. S. (독일)에 심취하고 자신의 나아갈 길을 탐구하고 있었는데, 그가 자기의 천성적 재능을 믿고 노력을 거듭하면 할수록 세속으로부터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72년(50세)에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될 때까지 오라토리오 「속죄 Rédemption」(1872)를 비롯, 미사곡 · 찬가 · 오르간곡 등 많은 종교 음악을 썼지만, 어느 하나도 세상의 주목을 받은 작품은 없고, 단지 오르간 주자로서의 역량을 평가받은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오르간 교실에서는 (독일)나 (독일)에 바탕을 두면서도, 작곡 교실 이상으로 작곡을 학생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 제자 중에서는 당디(Vincent d'Indy, 1851~1931), 쇼송(Ernest chausson, 1855~1899), 피에르네(Gabriel Pierné, 1863~1937)를 비롯해서 프랑스 근대 음악의 성립에 공헌한 많은 작곡가가 배출되었다.

1880년(58세) 문화훈장을 받았으나 그것도 겉치레적인 것에 불과하고, 작곡가로서 주목받지 못하는 점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명작 「(교향곡)」(1888)의 초연도 청중의 하품과 음악가의 경시를 초래할 뿐이고, 평판이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세상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90년 프랑크(프랑스)가 회장을 맡고 있었던 국민음악 협회에서 「(실내악곡)」(1889)이 초연되었을 때인데, 이때만은 청중이 모두 일어나 떠나갈 듯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도 순간이고 그로부터 한 달 뒤, 마차에 부딪친 것이 원인이 되어 늑막염은 악화되어 갔다. 창작력이 바로 절정에 이르려 했던 프랑크(프랑스)는 1890년 11월 8일 68세의 생애를 파리에서 마쳤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독자의 작품을 추구해 가려했던 프랑크(프랑스)의 음악은 (독일), (독일)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전통적인 정신을 계승하여 그것을 종합하려는 것이었다. 기술적으로 말하면, 그가 완성한 순환 형식이 이것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프랑크(프랑스)의 엄격하고 소박한 작풍은 생존시에는 큰 인정을 못 받았지만, 이윽고 찾아오는 프랑스 음악의 황금 시대의 기초를 쌓은 공적은 극히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