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

모리스 라벨

[ Joseph Maurice Ravel ]

모리스 라벨

모리스 라벨

출생 - 사망 1875년 ~ 1937년
국적 프랑스
주요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스페인 랩소디
발레 모음곡 마 메르 루아
고귀하고 감상적인 왈츠
발레 모음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라발스
볼레로
(협주곡)
(협주곡)
(실내악곡)
현악 4중주곡 F장조
(실내악곡)
물의 유희
거울
(독주곡)
밤의 가스파르
쿠프랭의 무덤
치간
박물지
5개의 그리스 민요
마다카스카르 섬 토인의 노래
어린이와 주문

스페인 국경의 소도시 시부르(Ciboure)에서 3월 7일 태어났다.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으로는 시인 릴케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있으며, 작곡가 (프랑스)가 타계했다. 아버지는 프랑스계 스위스인으로 철도 기사, 어머니는 스페인계였다. 모리스가 태어나 몇 달 후 일가는 파리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그는 파리에서 생애를 보냈다. 아버지는 상당한 음악 애호가로서 모리스를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화성 공부를 시키며 작곡을 시도케 하고 있었다.

1889년(14세) 파리 음악원 피아노 예과에 입학,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다. 2년 후에는 본과에 진급하여 피아노 외에 화성법을 배웠는데, 이 무렵에는 (프랑스)와 사티 등 반 아카데믹 작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1897년(22세) (프랑스)를 사사한 후 이 경향은 더욱 강해지고, 1899년에는 이색적인 작품 (관현악곡)을 발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예로운 로마상 낙선

1901년(26세) 로마상 콩쿠르에 응모하여 2등에 입선하고 그 후 재차 시도했으나 어느 것이나 낙선, 1905년(30세)에는 마침내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그는 이미 (독주곡)(1901년)나 「(실내악곡)」(1903)을 비롯한 특이한 작품에 의해 신진 작곡가로서 세상의 주목을 모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 낙선 사건은 저널리즘의 대문제가 되고, 마침내 음악원 원장의 경질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당시 악단의 완고한 보수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귀재 라벨(프랑스)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도 되었던 것이다.

인상주의의 본가 다툼

학생 시대의 라벨(프랑스)은 결코 우등생 타입은 아니었지만, 말라르메와 포우를 애독하고 동료들과 새로운 예술의 경향에 대해 열심히 논하는 다감한 청년이었다. 음악가로는 특히 (프랑스)를 존경하고 「(관현악곡)」을 음악사상 최대의 걸작으로 인정하고 있어서, 이른바 인상주의의 작풍은 당시의 작품에도 크게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피아노 음악만을 생각하면 명작 (독주곡)에 나타난 획기적인 기법은 이미 (프랑스)보다 한 발짝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주위의 비평가나 음악가들은 두 사람 중 누구를 인상주의의 본가로 칠 것인가로 진지하게 논쟁할 정도였다. 이러한 주위의 논란은 어떻든간에 라벨(프랑스)의 음악적 감각은 명백히 (프랑스)와는 이질의 것이었다. 1905년(30세)의 피아노곡 (독주곡) 이후의 작품으로 강하게 정립되어 온 작풍은, 몽롱한 인상주의의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 고전음악의 명확하고 간결한 형식으로의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대전 후의 변모

1914년의 대전 발발까지 그의 창작 활동은 순조로웠고 신음악의 기수로서의 그의 사회적 위치도 더욱 확고해져 갔다. 이 10년 사이에 작곡된 약 20곡의 작품은 어느 것에 못지 않는 걸작으로, 특히 러시아 발레단의 주재자 디아길레프를 위해 쓴 발레 음악 (관현악곡)(1912)는 이 시기의 창작의 정점을 나타내고 있다. 허약한 라벨(프랑스)도 단기간 베르됭(Verdun) 공방전에 참가한 체험은 작풍에 전기를 가져오게 한다. 응소 직전에 완성한 「피아노 3중주곡」(1914)과 귀환 후의 제1작 「(프랑스)의 무덤」(1917)은 타고난 고전적 감각을 절제된 형식 속에 응결시켜 신고전주의의 작풍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 후 얼마 동안은 창작 활동도 뜻대로 진척되지 않아 부진한 시기가 이어진다. 전후의 파리 악단에는 미요, (프랑스) 등 젊은 세대의 대두가 심해서 신음악의 기수는 이미 라벨(프랑스)이 아닌 '프랑스 6인조'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시인 콕토(Jean Cocteau, 1889~1963)로 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난의 길이 그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이 길은 스스로의 손으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26년(51세)의 가곡집 「마다가스카르 섬 토인의 노래」와 1932년에 작곡된 왼손 및 양손을 위한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에 담긴 박력은, 그때까지의 고난에 찬 도정을 상기시키게 한다.

어머니가 물려 준 스페인 기질

한편, 전쟁 말기 무렵부터 그의 작품의 연주회가 각지에서 열리게 되고 지휘자로서의 연주 활동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자작의 연주를 통해 바로 청중의 반응에 접하는 귀중한 체험은 당연히 창작 활동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발레곡 (관현악곡)(1928)의 성공은 이러한 체험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었다. 원래 라벨(프랑스)의 성격의 일면에는 어머니가 물려준 스페인 기질이 있어서 이미 (관현악곡)(1908)와 「하바네라」(1895) 등도 작곡하여 성공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생생한 스페인의 숨결을 전한다고 하기보다는 세련된 도회적 감각과 치밀한 구성에 의해 계산된 스페인 취미라고 할 만한 것으로, 그 점에서 물의를 빚은 적도 있었다. (관현악곡)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닌데 획기적인 관현악법에 의한 단순한 주제의 끈질긴 반복에서는 더욱 청중의 반응을 계산한 상품적 감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라벨(프랑스)은 1933년경부터 신경계의 병이 악화되어 1937년 12월에 뇌수술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28일 파리에서 62세의 생애를 마쳤다.

스위스의 시계 기능공'

(러시아→미국)는 라벨(프랑스)의 정밀하고 꼼꼼한 작풍을 아버지의 스위스계 혈통에 관련시켜 그를 '스위스의 시계 기능공'에 비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벨(프랑스)은 결코 창의가 결여된 음악가는 아니었으며 음악사상 드물게 보는 귀재이며 천재이기도 했다. 연상의 (프랑스)와 함께 인상주의의 수법에서 출발했으나 (프랑스)가 생애를 이 수법에 걸고 독자의 세계에 침잠했음에 대해, 라벨(프랑스)은 일찍부터 인상주의의 한계를 꿰뚫어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지적인 작풍에는 이미 그 후의 음악사의 경향을 미리 알려는 요소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그 창작의 전성기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중단되었음은 비극이었다. 그 때문에 인상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악풍을 스스로의 손으로 개척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정치(精微)를 다한 작풍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