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아실 드뷔시

클로드 아실 드뷔시

[ Claude Achille Debussy ]

클로드 아실 드뷔시

클로드 아실 드뷔시

출생 - 사망 1862년 ~ 1918년
국적 프랑스
주요작품 (관현악곡)
(관현악곡)
(관현악곡)
3개의 교향적 스케치 바다
(관현악곡)
(실내악곡)
바이올린 소나타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판화
기쁨의 섬
영상
어린이 세계
전주곡 제1집
제2집
성 세바스티앙의 순교
잊어버린 노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파리 근교의 생 제르망 레이(St Germain Laye)에서 8월 22일 태어났다. 딜리어스(Frederick Delius, 1862~1934)와 문호 메테를링크(Maeterlinck)도 이 해에 출생하였으며,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운동이 시작되려 하던 시기였다. 양친은 도기상(陶器商)을 경영했고 클로드는 맏아들로 남녀 4명의 동생이 있었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자주 직업을 바꾸고 이사를 다녔다. 두 누이 동생은 칸(Canne)의 백모 집에 맡겨 두었는데, 어린 클로드는 이 백모를 찾아가는 것이 커다란 기쁨이었으며, 피아노의 기초도 여기서 배우기 시작했다.

우연히 시인 베를렌(Verlaine)의 의모(義母)가 되는 모테(Mauté) 부인에게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은 것이 그가 음악가가 되는 계기였다. 아마추어이면서도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모테는 무상으로 레슨을 맡았으며, 1872년(10세)에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이 허가되는데 이윽고 클로드의 관심은 피아노에서 작곡으로 옮겨 갔다.

로마 대상

당시 작곡가의 등용문으로 로마상 제도가 있었는데, 대상을 획득한 사람은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유학이 주어졌다. 1884년(22세) 그는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두번째 시도하여 수상했지만, 로마의 생활은 반드시 드뷔시(프랑스)에게 쾌적한 것만은 아니었다. 의무 기간인 2년을 마치자 곧 귀국하여 유학 작품의 하나인 「봄」을 완성(1887), 학사원에 제출했으나 파격적인 작풍 때문에 수리되지 않고 끝났다. 당시 그는 많은 청년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예술에 심취해 있었다. 1888년과 이듬해의 두 번에 걸쳐 바이로이트에 간 그는 이윽고 이 혁명적인 예술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반 바그너(독일)파에 기울면서 본래의 자기 천성적 재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반면 1889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접한 극동의 음악은 크게 그를 끌어당기고, 이후의 작풍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드뷔시(프랑스)의 가곡에는 베를렌의 시에 의한 것이 매우 많다. 베를렌에 대한 경도가 이윽고 상징파 문인들과 접촉하는 계기가 되고, 다시 말라르메(Mallarmè)의 '화요일 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에서 착상을 얻어 1894년(32세)에 완성했는데, 초연은 대호평이었다. 이 불후의 명작은 드뷔시(프랑스)가 장기간 탐구해 온 독자적인 어법의 결정으로 이미 구상하고 있었던 오페라 (오페라) 완성에 대한 커다란 자신감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오페라)

이듬해 1895년(33세)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오페라)의 구상은 다듬어졌으나 완성 상연까지에는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동안에 「빌리티스의 노래」(1898), 3곡의 「(관현악곡)」(1899)이 잇따라 완성되면서 그의 악풍은 더욱 다듬어져 갔다. 주로 피아노 교수의 수입에 의존하는 당시의 생활은 몹시 가난했지만, 1898년 봄(36세) 오페라 코미크 극장으로부터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오페라) 상연 결정의 낭보가 전해져 이 오페라는 마지막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이듬해 릴리 테크시에(Lily Texier)와 결혼, 가난하지만 충실한 생활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여러 가지 물의를 빚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오페라)가 겨우 완성, 초연되었다. 완전히 반 바그너(독일)적인 오페라의 상연은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켜, 위고의 「에르나니」 초연을 연상케 했는데 상연을 거듭할 때마다 그 성공을 확고하게 해갔다. 1903년(41세)의 일이었다.

「바다」(관현악곡)로의 탈피

그러나 그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오페라)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드뷔시(프랑스)가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오페라)로부터의 탈피였지만, 그것이 극히 곤란함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미 (독주곡)(1903)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1905년에 완성한 교향시 (관현악곡)는 그것을 선명하게 구현한 음악이었다. 그때까지의 그의 음악을 특징짓고 있었던 그 몽환적인 분위기는 이미 여기서는 구할 수 없었다.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멋진 음화(音畵)는 인상파의 화가가 구했던 색깔과 빛의 현실성을 음에 의해 추구한 것이라고 하겠다.

같은 해의 (독주곡) 제1집, 1907년의 「영상」(독주곡) 제2집, 이듬해의 「어린이 세계」, 그리고 「이베리아」(1909)나 (관현악곡) 제1집(1910)에 대해서도 이러한 작풍은 계속 내재해 있었다. 인상주의 음악은 이 10년 동안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계속 피어나게 한 것이었다.

자유로운 작풍의 만년

그러나 그는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았다. 미성의 유부녀 에마(Emma)와의 연애는 마침내 릴리와의 사이를 파국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많은 친구도 그의 곁을 떠나 드뷔시(프랑스)의 마음에는 고독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그런 분위기는 에마와의 사이에 둔 딸을 위한 (독주곡)에서조차 묻어난다. 그리고 이 고독 속에서 드디어 그는 최후의, 그러면서도 자유 자재의 작풍을 전개해 갔다. 신비극 (성악곡)(1911)가 그 첫번째 작품이었는데, 발레 「유희」의 초연(1913)은 실패였다.

그리고 이 해에 친구인 (러시아→미국)의 (관현악곡)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등, 이미 새로운 음악이 격렬하게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가 드뷔시(프랑스)의 명성은 이제 확고 부동했으나 그의 육체는 이미 암에 걸렸으며, 또한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의 애국심을 괴롭혔다. 1915년(53세) 수술을 받고 세력이 쇠약해진 그는 마지막 기력을 모아 프랑스 전통에 의한 6곡의 소나타 작곡을 결심했으나 셋째 곡인 「바이올린 소나타」(1917)를 써 냈을 때는 이미 기력이 쇄진했다. 1918년 병상은 극도로 나빠지고, 3월 25일 오후 독일문의 포성이 멀리서 울리는 가운데 파리의 자택에서 56세의 생애를 조용히 마쳤다.

음악 표현의 본질적 변혁

이른바 인상주의 음악의 시조인 드뷔시(프랑스)는, 바그너(독일)로 대표되는 무르익은 후기 낭만파 음악에의 가장 용감한 도전자였다. 그의 음악이 근대 음악 사상에 이룩한 획기적인 역할은 인상주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서양 음악의 표현 능력을 밑바닥에서 변혁하는 것이었다. 특히 동양적인 음감의 적극적인 섭취는 주목해야 한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음악가는 수없이 많지만, 그 직접의 정신적 후계자를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한 세계사의 커다란 변모가 드뷔시(프랑스)를 고립시키고 말았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