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Franz Joseph Haydn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출생 - 사망 1732년 ~ 1809년
국적 오스트리아
주요작품 교향곡 제45번 f샵단조 고별
교향곡 제92번 G장조 옥스퍼드
교향곡 제94번 G장조 놀람
교향곡 제100번 G장조 군대
교향곡 제101번 D장조 시계
교향곡 제102번 B플랫장조
교향곡 제104번 D장조 런던
(협주곡)
(협주곡) Op.101
(협주곡)
(실내악곡) F장조 세레나데 Op.3의 5
(실내악곡)
현악 4중주곡 제76번 d단조 5도 Op.76의 2
현악 4중주곡 제77번 C장조 황제 Op.76의 3
현악 4중주곡 제78번 B플랫장조 일출 Op.76의 4
(독주곡)
오라토리오 천지 창조
오라토리오 사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동쪽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Beaumarchais, 1732~1799)와 같은 해의 태생으로, 이 무렵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절대주의를 확립했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마차 수리공이며, 요제프는 누나 한 사람을 포함한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고 수양아저씨 (프랑스)의 집에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된다.

빈의 방랑 생활

1740년(8세) 빈의 성 슈테판(Stephen) 교회 합창단에 채용되어 소년 소프라노로서의 탁월한 기량을 보였으나 1749년(17세) 변성 때문에 그만두게 되어, 이후는 어려운 방랑생활에 들어갔다. 1759년(27세)에 겨우 보헤미아의 모르친(Morzin) 백작의 음악대 악장으로 취임하여 이 해에 교향곡 「제1번」을 완성한다. 이듬해에는 빈의 가발사의 딸 마리아(Maria)와 결혼하는데, 그는 평생 연상의 아내에게서 가정의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1761년(29세) 아이젠슈타트(Eisenstadt) 성주인 예술의 열렬한 옹호자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관현악단 부악장에 임명되었다. 새로운 활동기에 들어간 하이든(오스트리아)은 교향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여기서 작곡하였다.

에스테르하지의 관현악단

관현악단의 관리와 훈련이 그의 주임무였으며, 이로써 관현악 작법도 현저히 진보했다. 파울 안톤 후작은 1762년에 타계했는데 뒤를 이은 동생 니콜라우스 후작도 형에 못지 않는 열렬한 예술의 옹호자로, 관현악단은 충실히 확대되고 하이든(오스트리아)이 그 악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에스테르하자(Eszterháza) 별궁을 세우고 함께 여름 동안에는 전속 음악가도 동행하였는데, 1772년 여름 후작의 체재가 길어지자 「고별 교향곡」을 작곡하게 되는 유명한 일화가 생겼다.

이러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지런하고 충실한 악장 하이든(오스트리아)과 단원과의 사이는 매우 원만해서, 교향곡 외에도 단원을 독주자로 하는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많이 썼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전유럽에 퍼져 갔으나 1790년(58세) 니콜라우스 후작이 타계하고 관현악단도 해산되었기 때문에 하이든(오스트리아)은 명예 악장으로서 또다시 빈으로 거처를 옮기고 생애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런던 방문

빈의 악계는 하이든(오스트리아)에 대해 냉담했으나, 그의 명성이 자자하여 악장으로 초빙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 1745~1815)이 주최하는 연주회의 초대에 응할 결심을 했다. 잘로몬은 열렬한 하이든(오스트리아) 찬미자로서, 그의 작품 소개에 힘써 온 영국에서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이미 노령인 하이든(오스트리아)에게 있어 이 대여행은 대단한 결심을 필요로 했으나, 우수한 런던의 대관현악단의 매력이 이것을 감행케 하였다.

이 제1차 런던 방문은 대성공을 거두고 이른바 「잘로몬 교향곡」 중 제93번에서 제98번에 이르는 6곡의 완성이 그 최대의 수확이었다. 또 1792년 여행 중 본에 들러 (독일)을 만나, 그의 입문을 허락했다고 전해진다.

또다시 런던으로

1793년 1월 61세의 늙은 하이든(오스트리아)은 또다시 런던행을 결의,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허가를 겨우 얻어 출발했다. 이때 제98번에서 제104번까지의 마지막 6곡의 교향곡이 완성되었는데, 어느 것이나 고전 교향곡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완전히 무르익은 명작이다. 영국에서의 하이든(오스트리아)의 명성은 이번 여행에서도 전과 다름없었으며 연주회나 레슨에 의한 수입도 컸다. 쌀쌀했던 빈의 악계도 영국에서의 명성에 의해 마침내 이전에는 입회를 거부했던 음악 예술가 협회도 입회금을 면제하고 그 입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족된 그 만년

안톤 후작은 하이든(오스트리아)이 영국 체재 중에 사망하고 니콜라우스 2세가 그 작위를 계승하였다. 니콜라우스 2세는 1세 후작 시대의 그 문화적 전통을 부활하려 에스테르하지의 관현악단 재건에 착수했다. 또다시 악장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하이든(오스트리아)은 이번에는 빈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뻤다. 이 무렵 그의 관심은 오라토리오 제작에 쏠리고 있었는데, 영국에서 들은 (독일)의 (성악곡)가 커다란 자극이 되었음은 의심할 것도 없다. 1798년(66세)에 완성한 (성악곡)의 초연은 대성공이어서 소문은 순식간에 국외에도 퍼져 갔다. 행복한 만년이었는데, 나폴레옹군과의 관계가 긴박했던 시기인 만큼 하이든(오스트리아)이 오스트리아 국가를 작곡한 것은 감동적이었다.

1801년 (성악곡)를 완성한 뒤 하이든(오스트리아)의 건강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그리하여 에스테르하지의 악장을 그만두고 빈의 명예 시민으로 조용한 은퇴 생활에 들어갔으며, 창작의 붓을 꺾은 뒤로는 자신의 작품 목록 작성에 힘쓰고 있었다. 1806년에는 역시 음악가로서 성공한 동생 미하엘(Michael)이 죽었고, 하이든(오스트리아) 자신도 이듬해의 (성악곡) 연주회에 참석하여 마지막 환호를 받았다. 나폴레옹군의 포격 속에서 단 하루도 「황제 찬가」의 연주를 빠뜨리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완전히 쇠약해져 1809년 5월 31일 77세의 생애를 마쳤다.

고전적 기악 형식의 완성

하이든(오스트리아)의 가장 큰 공적은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고전파 기악 양식의 완성에 있다. 이러한 공적은 ‘파파 하이든(오스트리아)’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던 그의 원만한 인격에 의해 비로소 가능했다고 하겠다. 하이든(오스트리아)은 상사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근면한 음악가였으며 따라서 전통적인 감수성을 고지식할 만큼 존중하는 일면이 있었다.

한편, 이미 노경에 들어섰으면서도 런던을 재차 방문하여 대성공을 거두는 대담 무쌍한 발전성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 양면적인 성격이 그의 경우에는 멋진 균형을 유지하여 유례 없는 조화를 나타낸다. 하이든(오스트리아)이 확립한 고전파의 기악 양식이 그 후 오랜 생명을 유지하고 음악사의 발전의 중추를 이루어 온 비밀을 여기서 구해도 좋을 것이며 이것은 그의 음악이 오늘날도 많은 애호가를 갖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