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 유신의 영웅

[ 西郷隆盛 ]

요약 사이고 다카모리는 에도 시대 말기에서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인물로, 메이지 유신의 3걸 중 한 명이다.
군복 차림의 사이고 다카모리

군복 차림의 사이고 다카모리

출생 - 사망 1828년 1월 23일 ~ 1877년 9월 24일
시대 에도 시대 - 메이지 시대
직업 군인, 정치가
별칭 다카나가(隆永)
다케오(武雄)
고키치(小吉)
기치노스케(吉之介)
젠베(善兵衛)
기치베(吉兵衛)
기치노스케(吉之助)
사이고 미스케(西郷三助)
기쿠치 겐고(菊池源吾)
오시마 산에몬(大島三右衛門)
오시마 기치노스케(大島吉之助)
부모 : 사이고 기치베(西郷吉兵衛)
: 마사(マサ)
배우자 스가(須賀)
아이카나(愛加那)
이토코(絲子)

출생과 성장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7년 가고시마에서 사이고 기치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카모리의 신분은 하급무사였는데, 28세 때 사쓰마 번의 제11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를 따라 에도로 가서 주로 정계의 배후공작에 주력했다.

국정개입

1857년부터 다카모리는 나리아키라의 뜻에 따라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후쿠이 번의 하시모토 사나이와 함께 교토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그는 요시노부를 쇼군 후계자로 만드는 것에 실패했다. 그리고 곧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벌인 안세이 대옥 사건이 발발했다. 이에 그는 같이 활동하던 승려 겟쇼와 함께 가고시마로 도주했다. 그리고 그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던 번주 나리아키라가 사망한 후였으므로 사쓰마 번은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그는 겟쇼와 함께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겟쇼만 사망하고 그는 다시 살아났다. 사쓰마 번은 그에게 기쿠치 겐고(菊池源吾)라는 가명을 주어 오시마(大島)에 숨어 지내도록 했다.

그 뒤 1862년에 정치 상황이 달라지자 사쓰마 번은 다카모리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오시마 산에몬(大島三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정보공작 활동에 복귀시켰다. 당시 번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시마즈 히사미쓰는 교토와 에도에서의 활동을 위해 경험이 풍부한 다카모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히사미쓰는 다카모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토 상경을 결정했다. 그리고 다카모리에게 시모노세키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다카모리는 히사미쓰의 지시를 어기고 바로 교토로 상경하여 각 번에서 올라 온 지사들과 만났다. 다카모리는 과격파의 행동을 만류하여 히사미쓰의 의도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전공작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사미쓰의 눈에는 과격파들을 선동하는 것으로 비쳐졌고, 결국 다카모리는 주군의 명령을 어긴 죄로 또다시 유배당했다.

죠슈정벌

1864년에 사쓰마 번은 다시 다카모리를 소환하여 정보공작에 투입했다. 이때 다카모리는 제1차 죠슈 정벌군(長州征伐軍)의 참모로서 전쟁에 참가했다. 처음에 다카모리는 죠슈 정벌을 찬성했으나, 나중에는 관대한 처벌을 요청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이는 오사카에서 막부의 해군을 총괄하는 가쓰 가이슈를 만나 그의 웅번연합(雄藩聯合, 일본을 몇몇 강력한 번들이 권력을 쥔 연합국가로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 주장에 설득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카모리는 정벌군의 총사령관 도쿠가와 요시카쓰(德川慶勝)의 참모로서 죠슈에 대한 처분을 위임받고 단독으로 죠슈에 들어갔다. 다카모리는 죠슈 번의 책임자인 가로 2명이 할복하고 막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상황이 끝났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다카모리는 갑자기 막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65년에 막부가 또다시 죠슈 정벌을 시도하려고 하자, 이듬해에 죠슈 번의 기도 다카미쓰와 접촉하여 삿쵸동맹(薩長同盟)을 맺었다. 그리고 사쓰마 번은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와 시마즈 히사미쓰의 공동명의로 죠슈 재정벌에 반대하며, 전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조정에 제출했다. 그리고 막부에도 출병을 거부한다는 통고 서한을 보냈다.

1867년에 다카모리는 대정봉환(大政奉還, 막부가 지닌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것)을 주장하는 도사 번의 고토 쇼지로와 맹약을 맺는 한편, 죠슈 번과 히로시마 번의 토막파(討幕派, 막부를 반대하던 조직)와도 맹약을 맺고, 오쿠보 도시미치 및 이와쿠라 도모미와 결탁하여 토막밀칙(討幕密勅, 막부를 무너뜨리라는 비밀칙령)을 받아내기 위한 활동을 하는 등, 권모술수와 모략공작의 극치를 달리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67년 12월 9일, 왕정복고 선언이 내려졌을 때 다카모리는 교토의 궁성 문을 경비하고 있었고, 오쿠보는 회의에 참석한 다이묘와 조정의 대신들을 감시하며 위압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부를 무력으로 쓰러뜨리기 위해 다카모리와 오쿠보는 막부 측을 도발하여 도바후시미(鳥羽伏見) 전투를 야기했다. 다카모리는 도쿠가와 가문을 정벌하기 위한 정벌군의 참모가 되어 직접 에도로 가 가쓰 가이슈와 면담한 끝에 에도 성의 무혈입성을 성공시켰다.

1868년 11월에 가고시마로 돌아간 다카모리는 왕정복고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에 1869년 6월에 상으로 2,000석의 ‘영세록’을 하사받았고, 9월에는 정3위의 관위를 받았다.

1870년에 신정부의 참의(參議)인 오쿠보가 가고시마로 와서 다카모리에게 정부에 나와 같이 일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사쓰마 번에 남았다. 그러고는 막부와의 전투에서 개선한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이 요구하는 문벌 타파를 비롯한 번정개혁을 강제로 추진했다.

판적봉환(版籍奉還)1) 후의 메이지 정부는 사쓰마와 죠슈의 협력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가고시마로 보내 히사미쓰와 다카모리의 상경을 요청했다. 이러한 조정의 요청을 수락한 뒤 1871년 4월에 상경한 다카모리는 사쓰마, 죠슈, 도사 번의 병사로 구성된 친병 편성을 제안하여 실현했다. 그 뒤 6월, 다카모리는 참의에 임명되어 7월에 실시된 폐번치현(廢藩置縣)2)에 협력했다.

이후 10월에 이와쿠라 사절단이 출발하자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학교제도, 징병제, 지조 개정 같은 각종 개혁을 실시했다. 1872년 7월에는 참의 겸 육군원수가 되어 근위도독(近衛都督)에 임명되었으며, 징병제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는 사무라이 출신 군인들을 달래고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폐번치현 이후의 통일국가 건설에 대한 주체적 견해가 없었던 다카모리는 정부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전국의 사무라이들에게 끌려갔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장병들

사이고 다카모리와 장병들

정한론

1873년 6월, 조선과의 국교 수립이 난항에 봉착했을 때 정한론이 비등해지자, 다카모리는 본인을 대사로 파견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다카모리의 진의가 교섭을 통해 전쟁을 회피하고자 한 것인지, 국내의 불평불만을 외국과의 분쟁으로 잠재우기 위한 것인지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어찌되었든, 다카모리는 열심히 자신을 파견해주기를 요청했는데, 8월 17일 각의에서 다카모리의 조선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와쿠라 일행이 돌아온 후에 열린 10월 15일의 회의에서도 그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반대한 기도 다카미쓰 및 오쿠보 도시미치, 오쿠마 시게노부 등은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죠 사네토미(三條實美)가 병환으로 앓아눕자 이와쿠라가 그 대리를 수행했다. 그리고 이와쿠라는 10월 23일에 천황에게 요청하여 다카모리의 파견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뜻이 꺽인 다카모리는 곧바로 병에 걸렸다며 사직서를 제출하고 모든 관위의 반납을 신청했다. 그러고는 함께 정한론을 주장했던 소에지마 다네오미, 고토 쇼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도 신페 등과 더불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서남전쟁 및 만년

가고시마로 돌아간 다카모리는 1874년 6월에 학교를 설립하고 사무라이들의 자제를 받아들여 교육을 하는 한편, 농사와 수렵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1877년 1월에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이 가고시마의 육군 화약 창고를 습격하자, 2월에 가고시마 현의 현령(縣令)인 오야마 쓰나요시에게 정부를 심문하기 위해 상경한다는 전갈을 남겼다. 그러고는 병사 1만 5천 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구마모토 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하면서 가고시마로 도망쳤지만 부상을 입은 다카모리는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그는 사망 후에 조적(朝敵)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긍정적 평가도 이어졌는데, 교육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전제 권력에 대한 다카모리의 저항정신을 칭송하는 글을 썼으며, 우치무라 간조도 청일전쟁 중에 출간한 저서 『대표적 일본인』에서 그를 최고의 무사라고 칭송했다.

사후

1889년 2월, 헌법 반포 특별사면으로 정3위의 관위가 추증되었고, 1898년에 우에노 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또 1902년에는 아들 사이고 도라타로에게 후작의 작위가 수여되었다.

다카모리는 죽은 후에 대륙정책의 선구자로서, 또는 명리를 따지지 않는 비극의 영웅으로서 일본의 많은 국민이 신봉했다. 그런 만큼 그의 생존설이 끊이지 않아 소위 ‘사이고 전설’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져 유포되었다. 일례로 1891년에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 일행 중 죽지 않고 러시아로 도망갔던 다카모리가 동행한다는 소문이 일본 내에 퍼지기도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