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앙주

마거릿 앙주

[ Margaret of Anjou ]

요약 잉글랜드 왕 헨리 6세의 왕비로 장미전쟁이 발발하자 랭커스터 진영의 수장이 되어 에드워드 4세에게 맞섰다.
출생-사망 1430 ~ 1482

발루아-앙주 가문 출신으로 마르그리트 당주(Marguerite d'Anjou)라고도 불린다. 1430년 3월 앙주의 공작이자 나폴리의 명예 왕이었던 르네 당주(René d’Anjou)와 로렌의 공작부인인 이자벨(Isabelle de Lorraine)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앙주 가문의 신하이자 풍자소설의 작가로 유명한 (Antoine de la Sale)에게 교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445년 4월 23일 15세의 나이로 자신보다 9살 어린 와 결혼했다.

헨리 6세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정치보다는 종교에 관심이 더 많았던 무능력한 왕이었다. 마거릿이 왕비가 되었을 당시에도 잉글랜드는 여러 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1449년 서퍽이 몰락하면서 신하들 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자 잉글랜드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양대 경쟁구도가 되었다. 마거릿은 헨리 6세의 섭정을 맡았던 요크 공작 리처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453년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나자 그녀는 아들을 왕위에 앉힐 목적으로 랭커스터 가문에 힘을 실어주었고, 요크와 마거릿 일파의 첨예한 갈등은 곧 내전으로 번졌다. 1455년 5월에 발발한 장미전쟁에서 요크 가문은 랭커스터를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마거릿은 이에 굴하지 않고 두 번째 내전을 준비했으나 실패했다. 1460년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가 죽은 뒤 요크 가문이 왕위를 잇는다는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다. 그러나 마거릿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쟁은 곧 재개되었다. 얼마 뒤 리처드가 전사하자, 그의 아들 는 마거릿보다 먼저 런던으로 가 자신이 잉글랜드의 새 왕임을 선포했다. 헨리 6세는 포로가 되었고, 1461년 타우턴 전투(Battle of Towton)에서 에드워드 4세와 워릭 백작의 연합군에게 크게 패한 마거릿은 에드워드 왕자를 데리고 스코틀랜드로 달아났다.

그러나 왕이 된 에드워드 4세가 동맹이었던 워릭을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분노한 워릭은 에드워드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1470년에는  마거릿과 화해해 헨리 6세를 복권시켰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는 다시 세력을 모아 1471년 4월 바넛 전투(Battle of Barnet)에서 워릭을 죽였다. 마거릿은 그해 5월 튜크스베리 전투(Battle of Tewkesbury)에서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에드워드 왕자가 전사하고 헨리 6세까지 살해당하자 그녀는 더 이상 재기할 수 없게 되었다. 마거릿은 포로가 되었고 1475년 프랑스 왕 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났다.

프랑스로 건너온 마거릿은 1482년 8월 25일 앙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해는 앙제 대성당에 부모님과 함께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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