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헤롯

[ Herod ]

‘영웅의 ’이란 뜻. () 출신()으로서 과 그 인접 지역을 했던(B.C. 47 - A.D. 70년) 헤롯 가(家)에 속한 자들을 일컫는다. 헤롯 (家門)은 ‘헤롯 안티파테르 1세’(Herod Antipater Ⅰ)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본다. 그는 B.C. 1세기 초 하스몬 의 알렉산드로스 얀나에우스에 의해 이두매의 장군으로 등용되었다. 그 아들 ‘안티파테르 2세’(Antipater Ⅱ)가 그의 뒤를 잇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47년에 안티파테르 2세를 의 (징세관)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유대 지경을 다스리게 했다. 그로부터 ‘헤롯 왕가’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들의 지지를 얻고자 로 개종했으나 그와 그 들은 ‘이두매 출신’ 곧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는 생전에 두 아들(파사엘과 헤롯)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겼는데, 파사엘에게는 을 통치하도록 했고, 헤롯(후에 ‘헤롯 대왕’)에게는 을 맡겼다. → ‘’을 보라.

1.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 안티파테르 2세의 다섯 중 (次男)으로서, B.C. 47년 갈릴리의 첫 번째 총독이 되었다. 그는 총독 부임 직후에 일어난 산적 에케키아스의 난을 제압함으로써 유대인들과 당국의 지지를 함께 이끌어낼 수 있었다. B.C. 40년에는 로마 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대는 3년에 걸친 내전(內戰) 상태에 놓였던 관계로 B.C. 37년에 이르러서야 로마 군의 협조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파르티아 와 하스몬 왕가의 안티고누스 왕을 물리치고 실질적인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었다(B.C. 37-4년). 유대의 왕이 된 후에도 하스몬 왕가의 잔존 에 의해 견제를 받아 폐위 위기까지 가기도 했으나 그의 이용 가치를 높이 평가한 로마 당국에 의해 복권되어 B.C. 23년을 전후한 시기에 지난날 의 판도와 거의 맞먹는 넓이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견제 세력이었던 에게서 정치적 을 빼앗아 순수한 의회 기능만을 유지하게 했고, 또 도 단순히 종교적 기능만을 하도록 제한했으며, 대제사장 임면권을 자신이 가지기도 했다. 특히 그는 각종 건축 사업에 진력했다. 지 건설, 저수지와 수로 확충, 경기장, , 극장 건설 그리고 와 등의 건설에 힘을 쏟았다.

특히 그는 연안의 조그만 도시를 큰 항구로 만들어 아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 이름을 ‘’로 명명했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건축이라는 대 공사(B.C. 20년경에 시작하여 그의 사후 A.D. 64년경에 완공됨)를 펼치기도 했다.

한편, 그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유대인 통치자이면서도 이방인이었음)에 대한 한계를 느꼈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유대 순수 인 하스몬 왕가의 딸인 마리암느를 로 맞아 유대인들의 을 얻으려 했다. 그는 아내를 지극히 했지만, 자신이 잠시 실각한 틈을 타 마리암느와 의 불륜을 의심하여(특히,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의심함) 그 두 사람을 처형시키고 또 마리암느의 남동생 아리스토불루스, 조부, 모친, 그리고 마리암느의 두 아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왕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접한 때에는 의 들을 살육하는 잔혹성을 보였다(마 2:1-18). B.C. 4년 70세를 일기로 그가 죽자 그의 왕국은 세 아들(, 헤롯 , )에게 분할 통치되었다.

2. 아켈라오(Herod Archelaus) - 헤롯 대왕 사후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B.C. 4 - A.D. 6년)이 되었고(눅 3:1), 수많은 학살과 학정으로 로마 당국에 의해 공직에서 해임되어 고올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가 유대의 왕이 되었을 때 예수님의 의 요셉은 의 지시를 받아 가족을 데리고 갈릴리 으로 옮겨가 살게 된다(마 2:22).

3.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 갈릴리와 의 분봉왕(B.C. 4 - A.D. 39년)이 되었다. 에는 ‘분봉왕 헤롯’, ‘헤롯 왕’으로 언급된다(마 14:1; 막 6:14; 눅 3:19). 그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후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와 했고, 이를 비난하는 을 살해했다(마 14:1-12). 교활하고 에 능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라 불렸다(눅 13:32). 그는 로마 총독 에게서 을 받고 넘겨진 예수님을 심문했고 예수님을 희롱한 후 빌라도에게 다시 넘겨주었다(눅 23:7-11). 그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갈릴리 해안에 ‘’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를 ‘디베랴 바다’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는 과 병적인 잔혹성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마 14:1-22; 눅 23:7).

4. 헤롯 빌립 2세(Herod Philip Ⅱ) - 바타네아와 , 가우라닛, 얌니아 지역의 분봉왕(B.C. 4 - A.D. 34년). 헤롯 대왕과 그의 다섯 번째 아내인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헤롯의 아들 중 가장 존경을 받았고, 37년 간 영토를 롭게 다스렸다.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딸 를 낳았으나 계승자 없이 A.D. 34년 에 율리아스에서 했다. 생전에 를 비롯한 수많은 도시를 건축하였다.

5. 헤롯 1세(Herod Agrippa Ⅰ) -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로마 황실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글라우디오가 로마 황제에 등극하는 데 일조했다는 이유로 헤롯 안디바가 해임된 후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을 다스리는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A.D. 41-44년).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회와 대적하던 중 사도 야고보를 죽게 하였다(행 12:1-23).

6.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Ⅱ) 아그립바 1세의 아들. 부친이 사망할 때 겨우 17세의 나이였기에 부친이 다스리던 팔레스타인은 로마 총독의 직할이 되었고, 후에 칼키스 지역을 다스리다가, 뒤이어 갈릴리의 동부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다(A.D. 53-70년경). 그는 누이 버니게와 근친상간하여 유대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갔을 때 사도 바울을 대면한 적이 있고, 그때 바울의 변론을 청취하게 된다(행 25:13-26:29). 그는 바울의 무죄를 간파했으나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석방시킬 수 없었다(행 26:30-32). 그는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로서 A.D. 70년 예루살렘이 패망하자 로마로 가서 로마의 행정관이 되었고 A.D. 100년경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