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대

정약대

[ 鄭若大 ]

요약 대금 연주가. 헌종(1834~1849) 때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

1848년(헌종 14) 순원왕후(1789~1857)의 보령(寶齡) 60세 및 신정왕후(1808~1890)의 보령 40세를 경축하는 잔치 때 젓대차비[大笒差備]였다.

1848년 (御營廳)의 (細樂手)로 활동한 정약대는 가곡 반주에 뛰어났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逸話)가 구전(口傳)으로 전하고 있다. 정약대는 날씨가 좋던 궂던 상관하지 않고 매일같이 이른 아침이면 인왕산(仁旺山) 꼭대기에 올라 을 불고 또 불었다. 그가 매일 반복해 연습한 곡은 "밑도드리"였다.

나막신을 옆에 벗어 놓고 "밑도드리"를 한 번 연주한 뒤 나막신 속에 모래알 하나를 넣고, 또 한 번 연주한 후에 다시 또 한 알을 넣어 모래알이 신발에 가득 차면 비로소 하산하는 생활을 10년 넘도록 계속하였다. 그가 반복해 연습한 "밑도드리"라는 곡은 ""(步虛子)의 파생곡(派生曲)으로 한자로는 ""(尾還入)이었다. (雅名)은 ""(壽延長之曲)이다. 고종(1863~1907) 당시 정약대를 비롯해 당시의 (風流客)과 (歌客) 및 (琴客)과 명인에 관한 기록은 (安玟英)의 『』(昇平曲) 서문에 이렇게 전한다.

"당시 우대(友臺: 인왕산 기슭)의 여러 노인들도 모두 세상에 알려진 호걸들이다. 이들이 만든 계를 (老人禊)라고 하였다. ··· 오기여·안경지···김윤석은 당시에 이름난 금객이다. 과 은 당시 으로 이름났으며, 는 으로 이름났고, 안성여는 (洋琴)으로 이름났다. 홍진원과 서여심은 세상에 쓰이지 않은 문인이다.

대구기생 계월(桂月)과 강릉기생 행화(杏花), 창원기생 (柳綠)과 담양기생 (彩姫), 완산기생 매월(梅月)과 연홍(蓮紅)은 모두 이름난 기생이다. ·정약대·은 모두 당시에 뛰어난 악공(樂工)들이다. 이들이 계를 만들어 (昇平稧)라 하고 즐기며 잔치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선생이 사실상 우두머리였다. ··· 성상(聖上) 11년 단오절에 강릉에서 돌아온 나그네 안민영이 서문을 쓰다. 계유년(1873) 5월 하순"이라고.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8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