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대

육화대

[ 六花隊 ]

요약 조선초기 창제된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한 종목.

여섯 명의 (女妓)가 꽃을 들고 추는 육화대는 대곡(大曲)에 나오는 화무(花舞)를 본떠서 선초(鮮初)에 창작된 당악정재이다. (1469~1494) 때 공연된 육화대는 『』(樂學軌範 1493) 권4에 도설됐다. 즉 육화대는 여섯 무기(舞妓)가 각각 꽃을 들고 추는 꽃 춤이라고 『악학궤범』에 나온다.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이후 화무가 연행됐다. 육화대가무(六花隊歌舞)는 (曲破)처럼 일시 단절됐던 것을 (1418~1450) 이후 꽃을 주제로 중국 가무를 본떠서 창제된 (呈才)의 하나가 육화대라고 추정되고 있다.

화심(花心)인 중심무(中心舞)와 육화(六花) 및 (竹竿子)로 구성된 이 정재는 『악학궤범』 권4에 처음으로 나온다. 동쪽에 홍의(紅衣) 3인, 그리고 서쪽에 남의(藍衣) 3인으로 갈라서 각각 일념시(一念詩)·이념시(二念詩)·삼념시(三念詩)를 번갈아 가며 차례로 부른다.

그런데 조선말기 『』(呈才舞圖笏記 1893)에서는 동쪽의 3인은 옥색의(玉色衣)·자색의(紫色衣)·양람의(洋藍衣)를 입었다. 서쪽의 3인은 초록의(草綠衣)·진홍의(眞紅衣)·분홍의(粉紅衣)를 입었다.

일념시에서 삼념시의 노래는 원래대로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염(念)한 다음 번역시(飜譯詩)를 또 한 번 부른다. (一念歌)는 가곡 농낙(弄樂)과 계락에 얹어 부르고, (二念歌)와 (三念歌)는 가곡 편(編)에 얹어 불렀다.

19세기 후반 (晉州敎坊)에서 공연된 이 교방춤은 1867년(고종 4)부터 1870년(동왕 7) 사이 (鄭顯奭)이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지냈을 때 진주교방에서 연행됐다고 그의 『』(敎坊歌謠 1872)에 전한다. 1901년(광무 5)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탄신50주년기념 만수성절(萬壽聖節)의 (進宴) 때 공연된 정재의 한 종목이 육화대이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4.1703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279, 280, 356, 525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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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 4권(20) / 육화대

악학궤범 4권(20) / 육화대 ≪악학궤범≫에 기록된 조선 초기의 당악정재의 하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