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악수

세악수

[ 細樂手 ]

요약 조선후기 군영(軍營) 소속의 군악수(軍樂手).

(吹鼓手)와 대조적으로 세악수는 대체로 ·젓대··장구·북을 포함한 (三絃六角)으로 편성됐다. 18세기 무렵 (龍虎營) 소속의 세악수는 25명이고, 25명의 세악수가 (訓練都監)·(禁衛營)·(御營廳)에 각각 소속됐다고 『만기요람』(萬機要覽 1808)과 『장용영고사』(壯勇營故事)에 전한다.

중앙의 오군영(五軍營) 소속의 세악수 이외 지방관아(地方官衙)와 병영(兵營)에도 소규모의 세악수가 있었다. 즉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가 머물던 감영(監營)이나 관찰영(觀察營), 또는 병마절도사(兵馬莭度使)나 수군절도사(水軍莭度使)가 관장한 병영(兵營)에도 세악수가 있었다. (江華留守) 소속 세악수는 15명이고, (慶尙道觀察營)에는 40명, (忠淸道觀察營)에는 16명, (平安道觀察營)에는 12명, (平安道兵馬莭度營)에는 6명의 세악수가 있었다고 『여지도서』(輿地圖書 1760)에 전한다.

대체로 피리 2명, 젓대 1명, 해금 1명, 북 1명, 1명의 삼현육각 편성의 세악수는 군영의 진법 연습이나 활쏘기 등의 군사적 성격의 행사 때, 그리고 군대의 행진 및 관찰사의 때, 또는 과거 급제자의 축하행진인 (遊街) 때에도 연주하였다.

고관(高官)의 행차 또는 군대의 행진 때 을 담당한 세악수는 피리·젓대·해금을 연주하는 군악대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와 (螺角)·(喇叭) 같은 취주악기를 연주하는 취고수의 대칭어로 쓰였다. 1701년(숙종 27) 일본통신사행렬도(通信使行列圖)에 의하면, 통신사 행렬의 뒤를 따르는 세악수는 해금·북·젓대·장구·피리·징을 연주했고, 행렬 앞에서 연주하는 취고수와 구분됐다. 1711년(숙종 31)의 「조선통신사행렬도」(通信使行列圖)에 의하면, 세악수악대는 해금 1명, 북 1명, 젓대 1명, 장고 1명, 피리 1명, 1명, 1명, 이렇게 7명으로 편성됐다.

1763년(영조 29) 정사 조엄(趙曮) 일행에 포함된 세악수악대는 6명으로 구성됐다. 1773년(영조 49) 통신사 조태억(趙泰億)의 수행원 494명 중 세악수는 8명이었다. 1763년(영조 39)의 『수사록』(隨槎錄) 및 1876년 김기수(金綺秀)의 『』(日東記遊)에서도 세악수는 통신사 행렬의 뒤를 따랐다. 1926년의 「조선열성조능행도」(朝鮮列聖朝陵行圖)에 보이는 세악수의 편성은 해금 4명·젓대 4명·피리 4명·장고 4명으로 구성됐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3.1258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374~76, 386~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