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기

김성기

[ 金聖器 , 金聖基 ]

요약 거문고 연주가. 숙종(1674~1720) 때 거문고명인. 자는 자호(子瑚). 호는 낭옹(浪翁)·어옹(漁翁)·어은(漁隱)·조은(釣隱).
출생 - 사망 1649년 ~ 1725년

어려서 음악을 무척 좋아하고 노래를 잘 불렀으나 천한 신분과 가난 탓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의원(尙衣院)에서 활을 만드는 장인 바치노릇을 했다. 그는 에 능했을 뿐 아니라 (洞簫)와 (琵琶)의 연주기량도 뛰어났고, (金天澤)과 단짝으로 지냈다.

젊은 시절 상방궁인(尙房弓人)이었던 그는 음률을 워낙 좋아하여 활 만드는 일은 뒤로하고 거문고 배우는 일을 더 열심히 하였다. 그의 거문고 스승 (王世基) 밑에서 공부하던 이야기는 조수삼(趙秀三)의 『』(秋齋集) 권7에 전한다. 왕세기에게 배운 그의 거문고 연주기량에 대하여 "큰 잔치가 벌어질 때 재능있다는 음악가들이 다 모였다 하더라도 거기에 김성기가 빠지면 흠으로 여길 정도"라고 정래교(鄭來僑)는 그의 『』(浣巖集)에 기록하였다.

당대의 가객들 모두가 거문고명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김중열도 그에게 거문고와 퉁소를 배웠고, 왕족 출신의 남원군도 그와 친분 관계를 가지고 거문고를 익혔다. 당시에 연주했던 김성기의 음악은 『』(漁隱譜)와 『』(浪翁新譜)에 남아 전해진다. 만년에 한강변의 서호라는 물가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스스로를 고기잡이를 하는 늙은이라는 어옹(漁翁), 물 위에 떠 사는 늙은이를 뜻하는 낭옹(浪翁), 또는 고기잡이하며 숨어산다는 의미의 조은(釣隱)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만년의 삶은 그의 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강호에 버린 몸이 백구와 벗이 되어, 어정을 흘러놓고 옥소를 높이 부니, 아마도 세상 흥미는 이뿐인가 하노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 남원군(南原君) 이설 등이 스승에게서 배운 가락을 정리하여 1728년(영조 4)에 『낭옹신보』를 펴냈다.

김성기 관련의 기사는 남유용(南有容)의 『』(雷淵集)과 조수삼의 『추재집』에 각각 전하고 있다. 의 『완암집』 소재 「김성기전」(金聖基傳)에 이렇게 소개되었다.

"(琴師) 김성기는 원래 상방궁인이다. 성격이 음률을 좋아하여 작업장에 나가 바치 일은 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서 거문고를 배웠다. 그 정교한 기법을 터득하고 나서 드디어 활을 버리고 거문고를 전공하게 되었다. 후일 솜씨 좋은 (樂工)들은 다 그 밑에서 나왔다. 한편으로 퉁소와 비파도 다루었는데, 그 묘한 것이 모두 극치에 이르렀다. ··· 만년에는 서강 쪽에 셋방을 얻어 살았다. 작은 배를 사서 삿갓 도롱이에 낚싯대를 하나 쥐고 강물에 떠다니며 고기를 낚아 살아가면서 스스로 호를 조은이라 했다"라고.

정조(1776~1800) 때 (掌樂院)의 (僉正) (李英裕)의 문집 『』(雲巢謾藁) 소재 「기악공김성기사」(記樂工金聖基事)에서 맹인악사(盲人樂師) (朱世根)과 악공 김성기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143~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