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준

김관준

[ 金寬俊 ]

요약 성악가(서도민요). 배뱅이굿 명창. 배뱅이굿의 창시자. 1870년대 말경 평남 용강군(龍岡郡) 안골 출생.

서도명창 (許得善)의 후배로 이름을 떨친 그는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농군들이 부르는 "용강긴아리"·"용강타령" 등을 듣고 자라며 가락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용강 일대에서 명창으로 소문난 에게 과 가락을 익힌 그는 나날이 몰라보게 발전해 얼마 후에는 안골에서 이름난 이 되었다.

평안도 용강군 해운면 선덕산의 보림사(寶林寺) 주지로 있었던 적이 있는 그는 25살의 젊은 나이에 온 나라의 명창들이 모여드는 평안도 영변(寧邊)의 약산 등대로 가 그곳에서 1년간 서도소리의 가창기교를 연마한 후, 용강(龍岡)·강서(江西)·평양(平壤)·남포(南浦) 등지에서 "용강긴아리"·"용강타령"·""를 비롯한 서도민요와 를 부르는 직업 가수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계장화로부터 배운 ""의 내용과 가락을 다듬고 보충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1920년대 이후 "배뱅이굿"을 가지고 주로 평양에서 활동함으로써 명성을 떨쳤다. "배뱅이굿"은 그의 제자 (崔順慶)과 그의 아들 (金宗朝)에 의하여 서도 지방에 널리 퍼졌고, 1930년대에는 레코드에 취입되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작곡에도 조예가 깊어 "배뱅이굿"·"안중근의사가(安重根義士歌)"·""·""(赤壁歌)·"전쟁가"(戰爭歌)·(沈淸傳) 등을 서도소리로 지어 부른 명창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를 전후하여 지은 "안중근의사가"와 "전쟁가"는 일제의 탄압으로 전승되지 못했다. "배뱅이굿"·"까투리타령"·"적벽가"·"심청전"은 를 본떠서 서도소리로 지은 것이다. 이 중에서 "적벽가"는 아들 김종조(金宗朝)가 축소해 개편한 것을 서도명창 김종조가 불러왔다. "배뱅이굿"은 제자 김종조·(金七星)·(郭風)·최순경(崔順慶) 등이 잘 불렀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부르는 이가 극히 드물다. (李殷官)·양소운(梁蘇云)이 부르고 있지만 원형에서 많이 벗어났다. "배뱅이굿"의 올바른 가사를 아들인 김종조를 비롯해 제자 최순경 등에게 창법을 가르쳤다.

1930년대 레코드에 "배뱅이굿" 전곡이 취입되면서 전국에 알려지게 됐고, 김관준이 작사·작곡한 "배뱅이굿"은 태평음반에 전한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88~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