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수무

광수무

[ 廣袖舞 ]

요약 ① 조선초기 정재(呈才) 공연 때 소매 끝을 걷어잡지 않고 추는 춤사위.
② 조선시대 진연(進宴) 때 공연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한 종목.

① 조선초기 (呈才) 공연 때 소매 끝을 걷어잡지 않고 추는 춤사위. (蓮花臺) 공연 때 (樂官)이 "헌천수만"(獻天壽慢)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左童女)가 대열을 벗어나지 않고 광수무를 춘다. (受明命) 공연 때 악관이 ""(金盞子慢)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仙母)는 북향하여 춤을 추고, (左右挾)은 상대해 모두 광수무를 춘다.

(賀聖明) 공연 때 악관이 "헌천수만"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12명이 북향하여 춤을 춘다. 광수무가 끝나면 음악이 그친다. 『』(樂學軌範 1493)에 나오는 (聖澤) 공연 때 악관이 "헌천수만"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선모와 좌우협 8명은 북향하여 광수무를 춘다. 끝나면 음악이 그친다.

② 조선시대 (進宴) 때 공연된 (鄕樂呈才)의 한 종목. 『악학궤범』에 나오는 조선초기 (望闕禮)·(望宮禮)·(拜表箋)·(賀大妃殿) 및 (朝賀)·(朝參)·(宴享) 때 여러 정재가 끝나고 잔치가 끝날 때 (鄕樂)을 연주하고 여러 (女妓)가 그 음악에 따라서 노래 부른다. 잔을 올릴 때마다 여기 2명이 광수무를 춘다.

숙종 기해년(1719) 『』(進宴儀軌)에 의하면, 1719년(숙종 45) 육순을 축하하기 위한 대전진연(大殿進宴)의 칠작행례(七爵行禮)에서 광수무가 공연됐고, 1744년(영조 20) 중궁전(中宮殿)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및 영조를 위한 구작행례(九爵行禮) 때 공연된 광수무 관련 기록은 『진연의궤』(1744)에 전한다.

광수무의 그림은 1829년(순조 29) 『』(進饌儀軌)에 나온다. 이 정재를 포함한 새 향악정재 24종목은 대부분 무자년(1828) 『』(進爵儀軌)와 기축년(1829) 『진찬의궤』 및 무신년(1848) 『진찬의궤』에 도설됐다. 새 향악정재의 춤사위는 『』(呈才舞圖笏記 1893)에 전한다.

22명의 이 추는 이 정재는 먼저 무동 2명이 앞에 서고 그 뒤에 10명씩 두 열로 정렬하여 선 다음에 춤을 춘다. 무동들은 홍질남선상(紅質藍縇裳)과 녹색단령(綠色團領)을 입고 중단의(中單衣)·관대(冠帶)·화자(花子)를 걸치고 춤을 추었다고 (張師勛)의 『韓國傳統舞踊研究』에 나온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1.251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325, 328, 347~48, 508, 509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