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장막

[ 張邈 ]

요약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인.
출생-사망 ? ~ 195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군사
시대 후한

자(字)는 맹탁(孟卓)이며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지금의 山東省 陽穀) 출신이다. 진류군(陳留郡)의 태수(太守)를 지내 장진류(張陳留)라고도 불린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여포전(呂布傳)’에 따르면, 장막(張邈)은 의협기질이 있어 일찍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는 집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위급한 사람을 구해 주어 많은 재사들이 그에게 의탁했으며, 조조(曹操)·원소(袁紹)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후한서(後漢書)≫의 ‘당고전(黨錮傳)’에는 장막이 도상(度尚)·왕고(王考)·류유(劉儒)·호모반(胡母班)·진주(秦周)·번향(蕃向)·왕장(王章)과 함께 당시 사람들에게 이른바 ‘팔주(八廚)’로 불리며 ‘재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자’로 여겨졌다고 전해진다. 장막은 덕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삼공(三公)의 관부(官府)에 초빙되어 관직에 나서게 되었고, 기도위(騎都尉)와 진류태수(陳留太守) 등을 지냈다.

189년 동탁이 영제(靈帝)의 장남인 소제(少帝) 유변(劉辯)을 폐위시키고 차남인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 獻帝)을 왕위에 앉힌 뒤에 하태후(何太后)와 소제를 잇달아 죽이자 장막은 광릉태수(廣陵太守)로 있던 동생 장초(張超)와 함께 거병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90년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장막은 연주자사(兗州刺史) 유대(劉岱), 산양태수(山陽太守) 원유(袁遺), 동군태수(東郡太守) 교모(橋瑁) 등과 함께 산조(酸棗)에 주둔했고, 부하인 위자(衛茲)에게 군대를 주어 조조와 함께 변수(汴水)의 전투에 참전케 했다. 그러나 조조의 군대는 동탁이 파견한 서영(徐榮)에게 크게 패했고, 위자도 전사했다. 그리고 식량이 떨어진 산조의 의군은 해산하였다.

당시 장막이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가 된 원소의 오만한 태도를 질책하자 원소는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라고 시켰다. 하지만 조조는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원소를 꾸짖었고, 이 일로 장막은 조조와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조조는 193년 도겸(陶謙)을 정벌하러 떠나면서 집안사람들에게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막에게 가서 의지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192년 동탁을 죽인 여포는 원술(袁術)에게 몸을 맡겼다가 장양(張楊)을 거쳐 원소(袁紹)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다 다시 원소를 떠나 장양에게 갔는데, 도중에 장막을 찾아가 만나며 손을 맞잡고 맹세를 했다. 이 일로 원소는 장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장막은 조조가 원소의 말을 듣고 자신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년 조조가 다시 서주(徐州)의 도겸을 정벌하러 떠난 사이에 장막의 동생인 장초가 조조 휘하의 장수인 진궁(陳宮) 등과 공모하여 조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진궁은 장막에게 여포를 끌어들여 조조의 근거지를 빼앗아 함께 연주(兗州)를 다스리라고 설득했고, 장막은 진궁의 말에 따랐다. 진궁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여포를 맞이하여 연주목(兗州牧)으로 삼았으며 짧은 기간에 복양(濮陽)을 비롯한 연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조조의 군대는 순욱(荀彧)과 정욱(程昱) 등이 견성(鄄城)과 동아현(東阿縣), 범현(范縣)만을 지켰다. 그러나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거야(鉅野)에서 195년 여포를 물리쳤다.

여포와 진궁은 서주의 유비(劉備)에게 몸을 피했고, 장막도 여포를 따라가면서 옹구(雍丘)에 주둔하고 있는 동생인 장초에게 가족을 맡겼다. 조조는 옹구를 공격해서 장막의 가족 모두를 죽였다. 원술(袁術)에게 원병을 청하러 가던 장막도 부하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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