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포로수용소

거제 포로수용소

[ 巨濟 捕虜收容所 ]

요약 6·25전쟁 중 유엔군과 한국군이 사로잡은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던 곳.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분수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분수

지정종목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지정일 1983년 12월 20일
관리단체 거제시
소재지 경상남도 거제시 장평동 리 수월리 및 신현읍 양정리,고현리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근대정치국방 / 국방

1950년 발발한 6·25전쟁 중 유엔군과 한국군이 사로잡은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포로 관리에 인력과 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 급수가 용이하다는 점, 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포로 수용 규모는 처음에는 6만 명이었으나 나중에 22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 11월부터 섬의 중심부인 일운면 고현리(지금의 거제시 고현동)를 중심으로 용산리·장평리·문동리·양정리·수월리·제산리와 연초면의 임전리·송정리 그리고 동부면 저구리 일대의 총 1200만㎡ 부지에 수용소를 설치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부산에 있던 포로들을 이송하여 1951년 2월 말에 이미 5만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1951년 6월 말까지 북한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과 의용군 그리고 여성 포로 300명 등을 포함하여 최대 17만 3000여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포로수용소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경비 하에 포로자치제로 운영되었는데, 포로 송환 문제를 놓고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로 갈려 대립하였으며 유혈사태를 빚기도 하였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부에 조직을 만들어 소요 및 폭동 사건을 일으켰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친공포로들이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Francis Dodd) 준장을 납치하는 이른바 거제도포로소요사건을 일으켜 한달이 지난 6월 10일에야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유엔군 사령부가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를 분리 및 분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52년 8월까지 북한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거제도를 비롯하여 용초도·봉암도 등지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제주·광주·논산·마산·영천·부산 등지로 이송되어 소규모로 분산되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된 뒤 33일간에 걸쳐 거제도에 수용된 친공포로들이 모두 북한으로 송환됨에 따라 포로수용소도 폐쇄되었다.

잔존 건물의 일부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은 6·25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고, 1995년부터 유적을 공원화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유적공원은 1998년 9월에 착공하여 1999년 10월 1차로 유적관을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완공하였다.

총 6만 4224㎡의 부지에 조성된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부는 분수광장과 철모광장, 흥남철수작전기념비, 탱크전시관, 무기전시장, 당시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과 생활상 및 폭동현장 등을 재현한 디오라마관, 6·25역사관, 포로생활관, 극기훈련장, 포로생포관, 여자포로관, MP 다리, 포로들 간의 사상 대립을 매직비전으로 보여주는 포로사상대립관,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간의 격돌 장면을 첨단 복합 연출기법으로 재현한 포로폭동체험관, 송환심사 과정 등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포로설득관, 포로수용소유적관, 포로수용소의 막사와 감시초소 등을 실물로 재현한 야외막사, 경비대장 집무실과 경비대 막사 그리고 무도회장 등 실물 유적을 볼 수 있는 잔존 유적지, 기념촬영코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