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중국사상

중세의 중국사상

한제국(漢帝國)의 지배이론은 동중서(董仲舒)의 유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신비적인 음양사상과 결부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었다. 인간계의 사건과 자연계의 변이(變異)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어 천의(天意)가 거기에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천명(天命)을 받은 왕권을 수식하였다. 유교는 여기에 신비적인 색채를 가하여 한왕조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화(化)한 사상은 부질없이 신비적 ·미신적 경향을 조장하였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이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사적(意思的)인 천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를 기(氣)의 운행에 의한 물리적 자연이라 생각하여 미신타파에 노력하였으나 그 비판적 합리주의는 개인의 운명을 인정하는 점에서 커다란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영향도 미미하였다. 그러나 후한의 정치권력이 붕괴되자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노장사상이 번성하게 된다.

3∼4세기의 위(魏) ·진(晉) 시대에는 유교적인 예교(禮敎)에 얽매인 신사를 이[虱]에 비유하거나 사관(仕官)을 떳떳치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높아,유교의 성격도 한대(漢代)와는 다른 자유롭고 절충적인 것이 되었다. 노장의 도사상은 마침내 불교의 이해를 도와 특히 반야(般若)의 공사상(空思想)에 관한 깊은 철리(哲理)를 깨닫게 되어 현실적인 중국사상도 이 인도사상과의 교류로 더욱 폭을 넓히고 심화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사변적(思辨的) ·피안적(彼岸的) 불교는 끝내 주류가 되지 못하고, 수(隋) ·당(唐)에 와서 성립된 천태(天台) ·화엄(華嚴) ·선(禪), 그 밖에 중국불교의 제파(諸派)는 모두가 피안보다 현실을, 번잡한 것보다 간이직절(簡易直截)한 것을, 사변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중국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불교의 형성과정을 모방하여 를 조사(祖師)로 하는 도교가 민간의 미신을 포섭하여 성립되었으나, 종교사상으로서는 저속한 것이었다. 유교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사상적으로는 번성하지 못하였으나 당말(唐末)에 와서 (韓愈)가 이러한 풍조에 반대하여 유교의 복고적(復古的) 혁신운동을 주장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송학(宋學)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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