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령

오백령

[ 吳百齡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 때 형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냈으며,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호종하였다
출생-사망 1560 ~ 1633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구(德耉), 호는 묵재(默齋)이다. 직장(直長)을 지낸 오세현(吳世賢)의 아들로 1588년(선조 21) 생원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어머니를 죽이려 하자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았는데, 그의 효심에 감동한 왜적이 모자를 살려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효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조정랑을 지냈고, 1596년 이조참의에 올랐으며, 광해군 때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졌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廳)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파직되어 성 밖에서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형조참판에 기용된 뒤 승정원도승지·사간원대사간·이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냈으며,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를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승급되었다. 네 아들 가운데 오준(吳竣)은 서예로 명성이 높았고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오단(吳端)은 예조참의와 형조참의를 지냈다. 둘째 딸은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혼인하였다.

황해도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영정이 봉안되었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자 후손들이 충청남도 공주시 단성면 단지리의 사우로 이전하였는데, 이 사우를 오백령사우(吳百齡祠宇)라고 한다. 1641년(인조 19) 아들 오준의 공으로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사우에 증직 교지가 보존되어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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