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

조강

[ 趙綱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효자로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1579년 영릉참봉(英陵參奉)으로 부임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조강 유허비

조강 유허비

출생-사망 1527 ~ 1599
본관 한양(漢陽)
숙거(叔擧)
모계(慕溪)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모계집(慕溪集)》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자는 숙거(叔擧), 호는 모계(慕溪)이다. 파서(坡西) 조순생(趙順生)의 후예로 교위 조승윤(趙承胤)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할 때 극진히 봉양하였다.

정사현(鄭思顯)에게 글을 배우다가 후에 성제원(成悌元)과 송인수(宋麟壽)에게 배웠다. 1563년(명종 18) 학행(學行)으로 목사 이증영(李曾榮)이 천거하였으며,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1570년 청주의 유림들과 합의하여 신항서원(莘巷書院)을 창건하였다. 1572년 중부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76년 다시 충청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579년 영릉참봉(英陵參奉)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가 되고 이어 별제(別提)로 옮겼으며, 1581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가 되었다. 1586년 사옹원직장, 예빈시주부를 거쳐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589년 장령을 지내고 은진현감이 되었다가  얼마 뒤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산과 보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서 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으며, 의주의 행재소에서 수집한 군량미를 바쳤다. 그의 아들 조광익(趙光翼)도 아버지와 함께 죽산(竹山)에서 대적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주 솔재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창의사의 호칭을 하사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거두어 배로 운반하여 명나라의 지원군을 도왔다.

현종 때 충효로 정려되고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어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어필(御筆)을 받았다. 숙종 때 송천서원(宋泉書院)에 향사(享祀)하다가 지금은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蓮亭里)에 효충사(孝忠祠)를 세워 배향하고 있다. 저서로 《모계집(慕溪集)》이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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