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도

오희도

[ 吳希道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다가 1623년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을 지냈다.
출생-사망 1583 ~ 1623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득원(得原), 호는 명곡(明谷)이다. 1602년(선조 35)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4년(광해군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였고, 효성 또한 지극하여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기주관(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한 사관직)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임금의 말을 기록하는 일을 하였는데 이에 출중한 능력을 보이자 곧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간 바로 그해에 천연두에 걸려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의 ‘담양 후산리 명옥헌원림(전라남도기념물 제44호)’과 ‘담양 후산리 은행나무(전라남도기념물 제45호)’는 오희도와 관련된 문화재이다. 명옥헌은 오희도가 소요하던 곳에 그의 아들 오이정이 지은 건물이고, 은행나무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호남지방을 돌아볼 때 주변의 추천을 받아 오희도를 방문했을 때 인조의 말을 맸던 나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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