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응

이민응

[ 李敏應 ]

요약 일제강점기의 애국지사이자 자선사업가. 빈민구제와 무지계몽(無知啓蒙)에 앞장섰으며 만주에서 조선족에게 농사를 짓도록 하여 만주가 조선족 자치구의 기반이 되게 하였다.    
출생-사망 1876 ~ 195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행(敬行), 호는 수춘(壽春)이다. 1876년(고종 13) 강원도 춘성군 남면에서 돈령첨지를 지낸 이도상(李道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상당한 재력가 집안 출신으로 1894년(고종 31)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학부참서의 벼슬을 지냈다. 

1910년대에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외사리로 이주하여 여주와 이천 일대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였고 1920년 3월 재단법인 선린회를 설립하였다. 선린회는 식산주식회사 등을 통한 금융사업, 빈민구제사업, 육영사업, 농촌개량사업 등을 펼친 조직이었다. 또 지역 농촌 개발을 위해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농도강습소(農導講習所)를 개설하고 흥천면 외사리에 권농사(勸農社)를 조직하여 고리대금을 근절시키는 한편 소작료도 매우 저렴하게 징수하였다.

1922년 3천여 원을 들여 흥천면사무소를 신축, 기부하였다. 1926년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이수흥의 요청에 따라 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본 사법경찰의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농촌 주민의 생활 안정과 농촌 진흥을 목적으로 재단법인 기동보린사(畿東保隣社)를 조직하였다. 1930년대에는 만주로 진출하여 농지를 구입, 조선인을 규합해 농사를 짓도록 함으로써 만주가 조선족 자치구의 기반이 되게 하였다. 

1938년 다시 여주로 귀향하였으며 1943년 여주읍에 지금의 여주여자고등학교의 모태가 된 기동학원(畿東學園)을 설립하였다. 1946년 10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친서를 받고, 선린회 법인 재산을 기부하여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재단법인 설립에 착수하였고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봄에 교통사고를 당해 다음 해 사망했으며 묘는 경기도 시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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