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수

이해수

[ 李海壽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설서, 봉교, 호조참의, 대사간, 도승지, 여주목사,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출생-사망 1536 ~ 1598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대중(大仲), 호는 약포(藥圃) 또는 경재(敬齋)이다. 1536년(중종 30) 영의정을 지낸 이탁(李鐸)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3년(명종 18) 생원의 신분으로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검열에 등용되었으며 이어서 설서, 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22) 사가독서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응교, 동부승지, 호조참의, 대사간, 병조와 공조의 참의 등을 지냈다.

1582년(선조 15)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도승지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 동인의 세력이 커지자 여주(驪州)목사로 좌천되었다. 1587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1591년(선조 24) 특명에 의해 다시 여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서인 측의 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유배되자 이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왕을 의주로 호종하였다. 이후 대사간이 되었고 1594년(선조 27) 대사성을 거쳐 1596년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이어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성격이 강직하고 시와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1598년(선조 31)에 사망하였으며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참조항목

, ,

카테고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