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관북리 하동정씨 사정려

부여 관북리 하동정씨 사정려

[ 扶餘官北里河東鄭氏四旌閭 ]

요약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扶蘇山城) 내에 있는 조선시대 정려.
부여 관북리 하동정씨 사정려

부여 관북리 하동정씨 사정려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扶蘇山城) 내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정려

부소산성(扶蘇山城)의 옛 정문의 오른쪽에 있는 정려로 하동정씨인 정득열(鄭得說), 정택뢰(鄭澤雷), 정택뢰의 처 동래정씨, 정천세(鄭千世) 등 4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정득열(鄭得說)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임진왜란 때 민병 300여 명을 모아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결국 순절(殉節)하였다. 사천현감(泗川縣監)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선조 25년) 훈정(訓正)에 추증되고 1806년(순조 6) 승지로 증직되었다.

정택뢰(鄭澤雷)는 광해군의 폐모에 항소를 올렸다가 남해 절도로 귀양을 갔을 때 어머니 강씨가 따라왔다가 병이 나 위독하게 되었다. 이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리는 등 노력했으나 결국 돌아가시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눈이 멀어 그곳에서 죽었다. 이러한 사연이 전해지면서 1623년(인조 1) 지평에, 1806년(순조 6)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정택뢰의 부인 동래정씨는 남편이 죽자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년상을 마친 후 죽어 순조가 열(烈)로서 명정하였다. 아들 천세는 11살에 아버지를 여위자 밤낮으로 슬퍼하다가 열흘이 못되어 죽었다. 이에 1806년(순조 6)에 효로서 함께 명정하였다.

숙종 때 마천마을(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마천)에 정득열, 정택뢰의 충효정려가 먼저 세워지고 이어서 도래정씨와 정천세의 정려가 세워졌다. 이후 정려가 허물어지자 명정 현판만 보관하고 있다가 1960년 부소산 남쪽에 다시 세웠다.

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시멘트로 만든 직사각형의 기단에 세워졌다. 원형의 돌기둥을 주춧돌로 삼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려 이익공(二翼工)의 맞배지붕을 만들었다. 익공의 쇠서받침은 2개가 상하로 구부러져 있고 익공과 익공 사이에는 화반(花盤)을 설치하였다. 옆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정려각 안에는 4개의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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