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행
[ 李必行 ]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까지 어가를 호종하였으며, 경성판윤 등을 지냈다.
출생-사망 | 1589 ~ 1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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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광주 |
자 | 이원 |
호 | 천미 |
활동분야 | 정치 |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천미(天微), 자는 이원(而遠)이다.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의 증손자이며,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이사수(李士修)의 아들이다. 1623년(인조 1) 알성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와 저작(著作) 등을 지냈다. 이 일어나자 강화도까지 어가(御駕)를 호종하였고, 박사(博士)가 되어 한양으로 돌아온 뒤 병으로 사직하고 여주로 돌아갔다. 1628년(인조 6) 다시 박사에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한 뒤 전적·감찰과 예조·병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경성판윤 등을 지냈다. 이후 사간(司諫)과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등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여주에 머물다 사망하였다. 숙종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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