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순

민영순

[ 閔泳純 ]

요약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3·1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에 힘쓰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출생-사망 ? ~ 1929
본관 여흥
별칭 초명 영준, 자 덕윤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여흥(驪興), 초명은 영준(泳俊), 자는 덕윤(德允)이다. 고종 때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민성호(閔成鎬)의 아들로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리에서 태어났으며, 정응길(鄭應吉)의 딸과 혼인하였다. 12세 때인 1891년(고종 28) 이규봉(李圭鳳) 문하에서 시서(詩書)를 배웠고, 1895년(고종 32)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897년(광무 1) 가평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하였으며, 1912년 서울로 올라가 천도교 일에 종사하며 민족운동에 힘썼다.

1914년부터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밑에서 종무원 서기로 일하였으며, 1918년 이광수(李光洙)와 함께 《독립신문》 편집원으로 일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측 간사로 독립선언서 제작과 배포에 힘썼고,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 태화관의 경비를 맡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주소지가 가평으로 되어 있어 풀려났다. 이후 천도교에서 민족문화실현운동의 일환으로 발간한 월간 종합잡지 《개벽(開闢)》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개벽》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면서 요시찰 인물이 되었고, 매년 3월이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풀려나곤 하다가 1929년 고문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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