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보

이철보

[ 李喆輔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삼사의 청요직과 각 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지방관 때에는 성곽을 수축하는 등 국방 강화에 힘썼다.
출생-사망 1691 ~ 1770
본관 연안(延安)
보숙(保叔)
지암(止庵)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지암집》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보숙(保叔), 호는 지암(止庵)이다. 경종 때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정신(正臣)의 아들이며, 정조 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복원(福源)의 아버지이다. 1723년(경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한림을 시작으로 예문관과 삼사(三司)의 관직을 거쳤으며, 1731년(영조 7)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되었다.

각 도의 암행어사, 승지·대사간·이천부사(利川府使)·도승지·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쳐 호조·공조·병조·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1737년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1747년에는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57년 치사(致仕)한 후 궤장(几杖)을 받고 기로소에 들었다.

1741년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재직 중 북방의 성곽을 수축하는 등 국방 강화에 힘썼으며,《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편찬 때 편집당상(編輯堂上)으로 참여하였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때 거명(擧名)되면서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으나 무관함이 밝혀지고 역도(逆徒)들의 엄한 처벌을 주장하는 소를 올려 무사하였다.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형 길보(吉輔)와 함께 기로소(耆老所)에 든 데 이어 아들 복원(福源)과 손자 시수(時秀)가 모두 기로소에 드는 영광을 얻어 조선시대 최초의 삼세입사(三世入社)가 되었다. 시문집에《지암집》이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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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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