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하

조강하

[ 趙康夏 ]

요약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경상도관찰사로서 도민의 진휼에 주력하였고, 갑신정변 후에는 개화파 인사들의 국문을 맡아보았다.
출생-사망 1841 ~ ?
본관 풍양(豊壤)
경평(景平)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경평(景平)이다.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영하(寧夏)의 동생으로, 조대비(趙大妃)의 조카이다. 1864년(고종 1) 조대비의 일족이 대거 등용될 때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경기관찰사 등을 지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경상도관찰사 겸대구도호부사(慶尙道觀察使兼大丘都護府使)로 부임한 해에 경상도 일대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조정에 여러 번 장계(狀啓)를 올려 30만 냥의 진전(賑錢)을 하사받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전답 7,600결(結)에 대하여 감세해고, 특별히 공금 4만 냥을 나누어 주어 농자금 등으로 사용케 하였다.

1885년 이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공조판서·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 후에는 좌우포도대장이 되어 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인사들을 추국(推鞫)하였다. 그러나 개화당으로 지목을 받고 있던 유길준(兪吉濬)이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포도대장이 왕명을 빙자하여 구금하자 민응식(閔應植)에게 요청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고, 한규설(韓圭卨)의 집에 유폐(幽閉)되도록 하였다.

뒤에 선혜청제조·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지냈고, 1889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등을 지냈다.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布政洞) 경상감영공원(慶尙監營公園)과 수성구 시지동(時至洞)에 불망비(不忘碑)가 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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