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극인

송극인

[ 宋克訒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광해군 때 대북편을 들어 서인과 남인을 공격하고 폐모론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군이 쳐들어오자 중화부사로서 관찰사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망하여 탄핵을 받았다.
출생-사망 1573 ~ 1635
본관 여산(礪山)
신백(愼伯)
정곡(靜谷)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여산(廬山)이다. 자는 신백(愼伯)이고, 호는 정곡(靜谷)이다. 감찰(監察) 초(礎)의 아들이다.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검열·봉교·대교·형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1609년 성균관 전적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 정언에 임명되어 사간 이이첨(李爾瞻) 등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의 처벌을 청하였다. 이후 전적·지평·장령·사간·집의 등을 지내며 대북(大北) 편을 들어 서인과 남인을 공격하였으며, 폐모론(廢母論)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1627년(인조 5)에는 중화부사(中和府使)로 재직하였는데, 정묘호란으로 후금 군대가 쳐들어오자 관찰사에게 보고도 없이 도망쳤다가 삭탈관직당하였다. 1628년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서장관 신열도(申悅道)와 함께 명나라로 가던 중 모문룡(毛文龍)에게 은과 인삼 등을 빼앗겼으므로 이듬해 귀국한 후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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