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숭원

이숭원

[ 李崇元 ]

요약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좌참찬·형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공손·검약·정직하였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출생-사망 1428 ~ 1491
본관 연안(延安)
중인(仲仁)
시호 충간(忠簡)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중인(仲仁)이며, 세종 때 예조참판을 지낸 보정(補丁)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 32)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감찰어사를 지냈으며, 이듬해 사간원좌정언을 거쳐 1457년(세조 3)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459년(세조 5)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설화사건(舌禍事件)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가 형조정랑에 재등용되었고, 이어 이조정랑·세자문학(世子文學)·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중서사인(中書舍人)·사헌부집의 등을 지낸 후, 1468년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이듬해 동부승지에 올랐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1474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1477년 대사헌, 이듬해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 1481년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48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우참찬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정헌대부(正憲大夫) 좌참찬에 제수되었다. 1489년 다시 형조판서를 지낸 뒤, 1491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신병으로 곧 사직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공손·검약·정직하였으며 염치가 있었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1648년(인조 26) 지례(知禮:경상도 김천)의 도동사(道東祠)에 배향되었다.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비명(碑銘)이 전한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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