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

송악

[ 松岳 ]

요약 오늘날 북한에 위치한 개성(開城)의 옛 지명.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중반까지 백제가 강성할 때 약 1세기 동안 백제에 속하였다. 후에 555년(진흥왕 16)에 신라가 정복하여 신라 영토가 되었다. 신라 시대에 처음 송악군으로 개칭되어 불렸으며, 늦어도 7세기부터는 송악(松岳)으로 불렸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궁예(弓裔)가 도읍으로 정하였다(898).

919년(고려 태조 2)에 송악의 남쪽 지역에 도읍을 정한 다음, 935년 신라를 복속한 후에는 고려의 정식 수도로 정하였다. 960년( 11)에 개경으로 이름을 바꾸고, 995년( 14년)에는 개성부(開城府)로 승격시켰다. 이 개성부는 송악군과 개성군을 통합한 명칭으로, 수도의 영역이 확대된 것이다. 그리하여 ‘송악’이라는 명칭으로는 약 350년 정도 지속된 셈이다.

1010년(현종 1)에는 거란군의 침입으로 궁궐과 민가가 모두 불타는 참변을 겪은 후, 개성부를 현령으로 대치하였다. 1062년(문종 16) 개성부사로 부활시켜 개성현령 소관이던 정주, 덕수 등 11현을 개성부에 예속시켰고, 황해도에 있던 우봉군도 포함시켰다. 한 때 정치적 혼란으로, 묘청의 난(1135, 인종 13)이 일어나 서경(평양)천도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개경파에 눌려 무효가 된 일도 있었다.

1232년(고종 19)에는 몽골의 침입에 항전하기 위하여 (崔瑀)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1292년 1월(충렬 18)에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약 60년간 공도가 되었다. 1308년(충렬왕 34)에는 개성부로 다시 승격시켜, 도성내와 도성외로 분리하여 관리하였다. 도성내는 부윤 이하 행정관을 배치하고, 도성외는 현령을 두어 관리하였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뒤에도 태조~정종~태종 초까지 국도로 정하였으나, 1405년(태종 5)에 정치적 개혁을 위해 도읍을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1438년(세종 20)에는 개성 유수를 두었으며, 1467년(세조 13) 경기도에 소속되어 부윤 또는 판관이 배치되었다. 송악(개성)이 국가의 수도로 역할을 한 기간은 9세기말 궁예시대부터 조선 초기 1405년 한양천도 이전까지 약 500년 정도이다. 강화천도 기간 60년을 제외하면 그만큼 짧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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