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연

항연

[ 項燕 ]

요약 중국 전국시대 말기 초(楚)의 장군으로 진(秦)의 공세에 맞서 초(楚)의 방위와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출생-사망 ? ~ BC 223
국적 중국 초(楚)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장쑤성[江蘇省] 수쳰[宿遷]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초(楚)의 장군으로, 기원전 208년 반진(反秦) 봉기를 일으켜 초(楚)를 재건한 항량(項梁)의 아버지이며,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죽이고 진(秦)을 멸망시킨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項羽)의 할아버지이다. 하상(下相, 지금의 江蘇省 宿遷市 宿城區) 출신이며, 고열왕(考烈王, 재위 BC 262~BC 238) 때 초(楚)의 장군이 되었는데, 항씨(項氏)는 대대로 초(楚)의 무장(武將)을 해 왔던 귀족 가문이었다.

기원전 225년, 진(秦)의 20만 대군(大軍)이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을 장군으로 하여 침공해 왔다. 항연(項燕)은 초(楚)의 대장군(大將軍)으로 진(秦)의 대군이 두 갈래로 나뉘어 쳐들어온 것을 이용하여 이신(李信)의 군대를 기습하여 궤멸(潰滅)시켰다. 기원전 224년, 진(秦)은 노장(老將) 왕전(王翦)이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초(楚)를 침공하였다. 왕전(王翦)은 성채(城砦)를 견고히 지키고 나아가 싸우지 않는 전술로 초군(楚軍)의 허점을 유도하였다. 싸움을 걸어도 진(秦)의 군대가 응전(應戰)을 하지 않자, 방심한 초군(楚軍)은 동쪽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왕전(王翦)은 갑자기 군대를 이끌고 초군(楚軍)을 공격하였고, 항연(項燕)이 이끄는 초군(楚軍)은 패퇴(敗退)하였다.

그 뒤의 항연(項燕)에 관한 기록은 사서(史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史記)>의 ‘초세가(楚世家)’나 <(資治通鑑)>에는 항연(項燕)이 패퇴(敗退)하다가 기수(祈水) 남쪽에서 전사하였고, 그 뒤 진군(秦軍)이 초(楚)의 도읍인 수춘(壽春, 지금의 安徽省 壽縣)까지 쳐들어가 초왕(楚王) 부추(負芻)를 사로잡고 초(楚)를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초왕(楚王) 부추(負芻)가 진군(秦軍)에 사로잡히자 항연(項燕)이 장강(長江)을 건너가서 회남(淮南)에서 창평군(昌平君)을 새로 왕으로 옹립하며 초(楚)의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원전 223년, 왕전(王翦)과 몽무(蒙武)가 전선(戰船)을 만들어 장강(長江)을 건너 쳐들어와 창평군(昌平君)을 죽이자 자살했다고 전한다.

항연(項燕)은 초(楚)의 유민(遺民)들에게는 진(秦)에 대한 저항 의지와 초(楚)의 부흥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항연(項燕)이 죽은 뒤에도 그가 살아서 초(楚)의 부흥을 도모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대택향(大澤鄉, 지금의 安徽省 宿州市 宿縣)에서 반진(反秦) 농민 반란을 일으키면서 초(楚) 지역의 민심(民心)을 얻기 위해 항연(項燕)이 살아있다는 소문을 이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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