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

부소

[ 扶蘇 ]

요약 중국 진(秦) 시황제(始皇帝)의 장자(長子)이다. 장성(長城)에서 흉노(匈奴) 방어를 하던 몽염(蒙恬)의 군대를 감독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시황제가 죽은 뒤 호해(胡亥)와 이사(李斯), 조고(趙高) 등이 거짓으로 보낸 시황제의 조서(詔書)를 받고 자살하였다.
출생-사망 ? ~ BC 210
본명 영부소(嬴扶蘇)
국적 중국 진(秦)
활동분야 정치

중국 진(秦) 시황제(始皇帝)의 장자(長子)로서 성(姓)은 영(嬴), 이름은 부소(扶蘇)이다. 친모(親母)인 정비(鄭妃)가 <시경(詩經)> ‘정풍(鄭風)’에 실린 ‘산유부소(山有扶蘇)’란 노래를 잘 불러서 ‘부소(扶蘇)’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어질고 총명해서 시황제(始皇帝)와 중신(重臣)들의 신망(信望)을 얻었다고 한다. 

시황제(始皇帝)는 기원전 221년 오랜 전쟁을 끝내고 천하를 통일했지만, (阿房宮)과 (萬里長城)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고 (匈奴)와 남월(南越) 정벌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백성들의 조세(租稅)와 부역(賦役) 부담을 가중시켰다. 또한 형법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제정하고 적용하여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샀다. 기원전 213년(始皇 34년)에는 (李斯)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기(秦記)와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 이외의 책은 모두 불태워버린 ‘분서(焚書)’를 주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13년(始皇 35년)에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方士)가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도망을 치자, 자신을 비방한 460명의 유생(儒生)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는 ‘갱유(坑儒)’를 저질렀다.

부소(扶蘇)는 (焚書坑儒)가 천하의 안정을 해친다며 여러 차례 시황제(始皇帝)에게 간언(諫言)을 하였다. 시황제의 노여움을 산 부소(扶蘇)는 흉노(匈奴)를 막기 위해 장성(長城)에 주둔하던 (蒙恬)의 대군(大軍)을 감독하기 위해 북방의 상군(上郡)으로 보내졌다. 이것은 시황제(始皇帝)가 적자(嫡子)인 부소(扶蘇)에게 제왕(帝王)의 자질을 키우기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기원전 210년(始皇 37년), 시황제(始皇帝)는 나라를 두루 살피며 순행(巡幸)을 하다가 사구(沙丘, 지금의 河北省 廣宗)에서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시황제(始皇帝)는 죽기 전에 이사(李斯)와 (趙高)에게 부소(扶蘇)에게 유서(遺書)와 옥새(玉璽)를 전하고, 또한 부소(扶蘇)에게 곧바로 셴양[咸陽]으로 돌아가 장례를 주관하라는 명(命)을 전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시황제(始皇帝)가 죽은 뒤, 그의 막내아들 호해(胡亥)와 승상(丞相) 이사(李斯), 환관(宦官) 조고(趙高)는 함께 모의하여 호해(胡亥)가 황위(皇位)를 계승하도록 유서(遺書)의 내용을 날조(捏造)하였다.

또한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상군(上郡)으로 부소(扶蘇)와 몽염(蒙恬)에게 자결하도록 명령하는 시황제(始皇帝)의 거짓 조서(詔書)를 보냈다. 몽염(蒙恬)은 시황제(始皇帝)의 명령이 의심스럽다며 따르지 말 것을 권했지만, 부소(扶蘇)는 아버지의 명령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몽염(蒙恬)도 감옥에 갇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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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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