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철

김한철

[ 金漢喆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사간원·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몇 차례 파직당하였으나 청백리로 명망이 높았다.
출생-사망 1701 ~ 1759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사적(士迪)이고, 호는 가헌(可軒)이며,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용경(龍慶)의 아들이다. 1731년(영조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임명되었다. 그 후 지평·사간원정언을 지냈는데, 1737년,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붕당을 없애고, 백성을 보호하는 요령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1738년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교리가 되었고, 1741년 대탕평(大蕩平;노론·소론·남인·북인도 가리지 않는 탕평)을 내세우면서 남몰래 조정에 새로운 당을 만든다고 원경하(元景夏)를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공격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다시 기용되어 지평·수찬·교리·헌납 등을 지내고, 1743년에는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때 전직 관리들의 정부미 유용 사실을 밝혀냈으나 그 주모자를 자의(恣意)로 처형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가 1748년에 다시 기용되어 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752년에는 경기감사에 이어 이조참판에 올랐으나 사람을 잘못 천거하여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그 이듬해 대사간으로 발탁되었다.

1754년 공조참판을 거쳐 함경감사가 되었는데, 점검을 잘못한 일로 파직당하였다가 이듬해 대사성에 임용되었다. 1757년 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는데, 양전(量田)의 실시, 언로(言路)의 개방 등 다섯 가지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였다. 뒤에 우참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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