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침

남궁 침

[ 南宮枕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전라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한성부판윤 등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참판에 올랐다. 영의정 윤원형이 실각할 때 그와 한패라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출생-사망 1513 ~ 1567

본관은 함열(咸悅)이며, 자는 성중(誠仲)이다. 동복현감(同福縣監) 익(翼)의 아들이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언·지평·헌납·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48년 강원도암행어사가 되어 원주 등지를 둘러보고 구황(救荒)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하여 목사(牧使) 박형린(朴亨鱗)과 판관(判官) 박란(朴蘭)을 파직시켰다.

이어 이조좌랑·사인(舍人)·부응교(副應敎)를 지냈으며, 1549년(명종 4)에는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2년에는 경상도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들을 적발하였고, 이후 홍문관직제학·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58년 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우윤·한성부좌윤·전라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이 실각할 때 그와 한패라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잠시 벼슬에서 물러났을 뿐 다시 복직하여 오위도총부부총관·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일찍이 바른 말을 하던 구수담(具壽聃)을 모함하여 사사(賜死)하게 하는 등 탐학하다는 평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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