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근

고영근

[ 高永根 ]

요약 대한제국 때의 관료이다.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만민공동회의 회장에 뽑혔고, 만민공동회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정부의 개혁을 유도하였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과격한 계획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였고 일본으로 피신, 그곳에서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 우범선을 제거하였다.
출생-사망 1853 ~ 1923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閔泳翊)의 시중꾼으로 궁중에 드나들다가 과 의 눈에 들어 1891년 함경도 매광감리(煤鑛監理), 1893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898년 중추원의관에 임명되는 등 고속승진을 거듭하였다.

1898년 보부상들의 단체인 (皇國協會) 부회장을 지내다가 협회가 수구파 폭력단체가 됨을 깨닫고 탈퇴하여 와 에 가담하였다. 친러정부가 등장한 것에 울분한 시민이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군중집회)를 개최한 가운데(1898. 11. 5), 고영근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의 지도하에 만민공동회는 6일간 철야 시위를 하면서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을 성공시켰고, 이어서 독립협회 복설, 독립협회를 모략한 자 처벌, 헌의 6조 실시 등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황국협회가 투입한 보부상의 공격으로 만민공동회가 괴멸 직전에 있었으나 보부상 집단을 역공하여 회복시켰고, 만민공동회 해산을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황국협회계 인물 8명 처벌, 보부상 혁파, 시민이 원하는 인재 등용이란는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정부가 임명한 중추원의관에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출신의 17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 정부의 무력에 의해 1899년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만민공동회가 붕괴되자, 이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1899년 최정덕(崔廷德) 등과 함께 수구파 대신들을 암살할 계획을 짰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피신하였다.

1899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하여 (朴泳孝), (尹孝定), 등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고영근은 윤효정을 통해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전모를 전해듣게 되었다. 히로시마 인근 구레시[呉市]에 거주하고 있는 우범선에게 접근하여 그의 신뢰를 얻은 다음, 1903년 11월 24일 종자(從子)인 노원명(盧遠明)과 힘을 합하여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우범선(禹範善)을 죽였다. 이 일로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조선 정부의 교섭으로 1909년 국내로 송환되고 죄도 면하게 되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여 (洪陵)에 묻히자, 1921년 3월 능참봉(능을 지키는 하급 관리)이 되어 무덤을 지켰다. 홍릉 비문의 문구를 두고 조선총독부와 이견으로 능비가 세워지지 못하자 이를 자의적으로 건립하였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파직되었으며, 이듬해 병사하여 홍릉 인근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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