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

미자

[ 微子 ]

요약 중국 상(商)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이복형으로서 상(商)이 멸망한 뒤에 주(周) 성왕(成王)에게 송(宋)의 제후로 봉(封)해졌다. 비간(比干), 기자(箕子)와 함께 상(商)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
출생-사망 ? ~ ?
본명 계(啟)
국적 중국 상(商)
활동분야 정치

이름은 계(啟)이며, 상(商)의 29대 제을(帝乙)의 장자(長子)로서 주왕(紂王)의 이복형이다. 어머니가 정후(正后)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위(王位)를 계승받지 못했으며, 미(微)에 봉(封)해져 미자(微子)라고 불렸다. 봉작(封爵)과 이름을 합쳐 미자계(微子啓)라고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며, 한 대(漢代)의 사서(史書)에서는 경제(景帝, BC 188~BC 141) 유계(劉啓)의 이름을 피해 계(啟)가 아니라 개(開)로 표기되어 있다. 춘추(春秋) 시대의 제후국(諸侯國)인 송(宋)의 시조(始祖)이기도 하여 송미자(宋微子)라고도 하며, 송(宋)이 자(子)를 국성(國姓)으로 하였기에 자계(子啟)라고도 한다. 그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성격으로 사람들의 신망(信望)을 받았으며, 비간(比干), 기자(箕子)와 함께 상(商)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

상(商)의 주왕(紂王)은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妲己)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녹대(鹿臺)’라는 화려한 궁궐을 짓고,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미자(微子)는 여러 차례 간언(諫言)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자(微子)는 상(商)의 예악(禮樂)을 담당하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를 하여 아우인 자연(子衍)과 함께 상(商)을 떠나 봉지(封地)인 미(微)로 돌아갔다. 결국 기원전 1046년 주왕(紂王)은 주(周) 무왕(武王)에게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패하고 자살하였다.

상(商)이 멸망한 뒤 미자(微子)는 주(周) 무왕(武王)을 찾아가 투항하였다. 당시 미자(微子)는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왼손으로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으로는 띠[茅]를 잡고 무릎을 꿇으며 상(商)의 종사(宗祀)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간청했다. 무왕(武王)은 미자(微子)의 청을 받아들여 주왕(紂王)의 아들인 [武庚, 녹보(禄父)라고도 한다]을 상(商)의 도읍인 은(殷, 지금의 河南 安陽)에 봉(封)하여 상(商)의 종사(宗祀)를 잇도록 하였다.

기원전 1043년 무렵 무왕(武王)이 죽고 나이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왕(武王)의 동생인 (周公) 희단(姫旦)이 섭정(攝政)이 되어 주(周)를 통치하였다(주공이 왕위를 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그러자 무경(武庚)은 이에 불만을 품은 무왕(武王)의 다른 형제들인 (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삼감(三監)의 난(亂)’이라고 하는데, 반란은 3년 만에 진압되었고 무경(武庚)은 주살(誅殺)되었다. 주공(周公)은 반란을 진압한 뒤 옛 상(商)의 영역를 송(宋, 지금의 河南 商丘)과 위(衛, 지금의 河南 淇縣)의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위(衛)에는 자신의 막내동생인 강숙(康叔) 희봉(姫封)을 봉(封)하여 상(商)의 유민(遺民)들을 통제하였고, 송(宋)에는 미자(微子)를 봉(封)하여 상(商)의 종사(宗祀)를 잇도록 하였다. 미자(微子)는 상(商)의 문화 전통을 계승하여 송(宋)을 훌륭히 통치하여 안정시켰다. 그는 자식을 남기지 않아 아우인 자연(子衍)이 그의 뒤를 계승하였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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