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공주

안락공주

[ 安樂公主 ]

요약 중국 당(唐) 중종(中宗)의 막내딸로서 황태녀(皇太女)가 되어 황위 계승을 획책했으며, 710년 어머니인 위황후(韋皇后)와 함께 중종(中宗)을 독살하였다.
출생-사망 684 ~ 710
본명 과아(裹兒)
국적 중국 당
활동분야 정치

성은 이(李), 이름은 과아(裹兒)이며 중국 당(唐)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과 위황후(韋皇后, 660? ~ 710)의 막내딸이다. 중종(中宗)이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에게 폐위되어 방주(房州, 지금의 湖南省 房縣)로 유배되었을 때 태어났는데, 중종이 자신의 옷을 벗어 감싸주어 ‘쌀 과(裹)’와 ‘아이 아(兒)’ 자(字)를 이름으로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위황후는 중종과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막내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워 총애(寵愛)를 받았다.

698년 중종은 유배에서 벗어나 황궁(皇宮)으로 돌아와 황태자(皇太子)가 되었으며, 안락공주는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조카인 무삼사(武三思, ?~707)의 둘째아들 무숭훈(武崇訓)과 결혼했다. 705년 재상(宰相) (張柬之, 625~706)의 정변으로 중종은 다시 황위에 올랐고, 안락공주는 중종과 위황후의 총애를 배경으로 권세(權勢)를 누렸다. 중종은 안락공주가 칙서(勅書)를 만들어 오면 그 내용을 보지도 않고 승인을 해 줄 정도로 그녀를 총애하였다. 안락공주는 자신의 어린 자식들을 태상경(太常卿)과 호국공(鎬國公)으로 봉(封)하고,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안락공주는 뇌물을 받으면 묵필(墨筆)로 쓴 조칙(詔勅)을 비스듬히 봉함해 관직을 제수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사봉관(斜封官)이라고 했다. 이렇게 안락공주에게 뇌물을 주고 벼슬을 얻은 사람이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안락공주는 백성들의 자녀를 빼앗아 마음대로 노비(奴婢)로 삼고, 논밭을 빼앗아 연못을 만드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그녀가 백성들의 농지를 빼앗아 곤명지(昆明池)를 본떠 만든 ‘정곤지(定昆池)’는 사방 넓이가 49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락공주는 무삼사, 상관완아(上官婉兒, 664~710) 등과 공모하여 황태자(皇太子)인 이중준(李重俊, ?~707)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태녀(皇太女)가 되려고 하였다. 위원충(魏元忠)의 간언(諫言)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황태자(皇太子) 이중준(李重俊)은 안락공주와 위황후에 반발하여 707년 이다조(李多祚)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무삼사(武三思)와 무숭훈(武崇訓) 등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정변이 실패하여 중난산[終南山]으로 도주하다가 죽었다. 남편인 무숭훈(武崇訓)이 죽자 안락공주는 무연수(武延秀)와 재혼하였다.

710년 연흠융(燕欽隆)이 중종에게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음행(淫行)과 악행(惡行)을 고했고, 중종의 추궁을 두려워한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공모하여 중종을 독살하였다. 그리고 중종(中宗)의 넷째 아들인 온왕(温王) 이중무(李重茂, 695~714)를 황제로 옹립하였다가 황위를 양위받아 직접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睿宗, 재위 684~690, 710~712)의 아들인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 685~762, 뒷날 현종이 됨)와 측천무후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 663?~713) 등이 정변을 일으켜 위황후와 안락공주, 무연수 등을 죽이고 예종(睿宗)을 다시 황제로 세웠다. 안락공주는 죽은 뒤 그 지위가 패역서인(悖逆庶人)으로 격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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