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사키 야타로

이와사키 야타로

[ Iwasaki Yataro , 岩崎彌太郞(암기미태랑) ]

요약 일본 메이지 시대의 기업가. 미쓰비시 재벌[三菱財閥]의 창설자이다.
이와사키 야타로

이와사키 야타로

출생-사망 1835.1.9 ~ 1885.2.7
국적 일본
활동분야 경제
출생지 고치 현 아키 시

휘(諱)는 민(敏)이고, 호는 동산(東山)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의 후원을 받아 해운업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정상(政商)으로 일본의 3대 재벌 가운데 하나인 미쓰비시 재벌[三菱財閥]의 기초를 닦았다.

1835년 [四國] 섬 중남부에 위치한 도사 번[土佐藩, 지금의 (高知縣)] 아키 군[安芸郡, 지금의 아키시(安芸市)]의 이노쿠치 촌[井ノ口村]에서 이와사키 야지로[岩崎彌次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하층 무사(武士)인 향사(郷士) 출신이었으나 증조부 때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향사의 신분을 팔아넘겨 지게로닌[地下浪人]에 속했다. 어려서 도사 번의 유학자인 오카모토 네이호[岡本 寧浦, 1789~1848]의 사숙(私塾)인 홍우사(紅友社)에서 역사와 한시 등을 배웠다. 14세 때에 도사 번의 번주(藩主)인 야마우치 도요테루[山内豊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21세 때 그의 후원으로 에도[江戸]로 유학을 떠나 주자학자인 아사카 곤사이[安積艮斎, 1791~1861]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 곧바로 도사 번으로 돌아와 요시다 도요[吉田東洋, 1816~1862]가 고치성[高知城]의 교외에 세운 소림숙(少林塾)에 들어가 그에게 학문을 배웠다.

1858년 요시다 도요가 다시 도사 번의 참정(参政)으로 임명되었을 때 이와사키 야타로도 함께 번주인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 1827~1872]에게 등용되었으며, 1859년에는 번(藩)의 관리들과 함께 나가사키[長崎]로 출장을 가기도 하였다. 1862년 요시다 도요가 암살된 뒤에는 오사카[大阪]로 피신했으나 다시 도사 번으로 돌아와 관직에서 물러났다.

1867년에 도사 번에서 경영하는 상사(商社)인 개성관(開成館)의 나가사키 상회(商會)에 주임(主任)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서구의 상사들과 교역을 하며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익혔다. 이때 나가사키에서 가메야마 조합[龜山社中]을 세워 활동하던 [坂本龍馬, 1836~1867]와도 교류하였다. 1868년 나가사키 상회가 폐쇄되면서 개성관의 오사카 상회로 옮겨 해운업에 종사했다. 오사카 상회는 의 영향으로 1869년 도사 번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기업이 되어 쓰쿠모 상회[九十九商會]로 이름을 바꾸었다.

번[藩]이 폐지되고 현(縣)이 설치되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이 이루어지자 이와사키 야타로는 1873년 도사 번의 부채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배 2척을 구입하여 해운업을 시작했으며, 쓰쿠모 상회를 인수하여 미쓰비시 상회[三菱商會]를 설립했다. 특히 그는 메이지 정부의 화폐개혁 과정에서 정부의 고위관리와 결탁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다. 메이지 정부는 1874년부터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각 번(藩)들이 발행했던 번찰(藩札)과 교환해주기 시작했는데, 이와사키 야타로는 메이지 정부의 고관이던 [後藤象二郎, 1838~1897]를 통해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는 번찰들을 대량으로 사들여 교환 과정에서 막대한 차익을 얻었다.

그리고 미쓰비시 상회는 1874년부터 1877년까지 정부의 해상 운송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으며 규모를 확장하였다. 1874년 메이지 정부가 대만(臺灣)을 침략했을 때 병사들과 군수품의 운송을 맡아 정부의 신임을 받았으며, 그해 일어난 사가[佐賀]의 난에서 1877년에 일어난 세이난 전쟁[西南戰爭]까지 일본의 서남부 지방에서 벌어진 내란에서도 운송을 독점하였다. 1875년 일본이 한국의 강화도(江華島)를 침략할 때에도 미쓰비시 상회의 배들이 군수품을 운송하였다. 그해 이와사키 야타로는 국유회사인 일본국우편증기선회사(日本國郵便蒸気船會社)를 미쓰비시 상회와 합병하여 우편기선미쓰비시회사(郵便汽船三菱會社)를 설립했다. 이렇게 정부의 해상 운송을 독점한 결과 처음 2척의 배로 시작된 미쓰비시 상회는 1877년에는 61척의 기선을 소유하는 규모로 빠르게 성장했으며, 조선업·은행업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미쓰비시 상회가 해운업을 독점하면서 운송료가 폭등하자 1882년 미쓰이물산[三井物産] 등의 기업은 공동운수회사(共同運輸會社)를 설립해 미쓰비시 상회와 맞섰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미쓰비시 상회는 1885년에 헐값으로 공동운수회사를 인수해 일본우선(日本郵船)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와사키 야타로는 공동운수회사와 합병하기 직전인 1885년 2월 7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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