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휴

장문휴

[ 張文休 ]

요약 발해의 장군. 732년에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출생-사망 ? ~ ?

발해는 고왕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었고, 2대 무왕[大武藝] 때에는 영토면에서 크게 성장하여 연해주 대부분을 포괄하는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발해국 북쪽에 위치한 흑룡강 하류에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다른 말갈 부족과는 달리 강한 면모를 보이며(다른 말갈 부족들은 고구려에 모두 통합되었었음)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흑수말갈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자, 당나라는 흑수말갈을 ‘흑수주’(黑水州)라 부르며 당이 통치하려 하였다.

이에 뒤로부터 위협을 느낀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당의 보호 하에 있던 흑수말갈을 공격하면 당의 공격을 받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여 겁을 먹고, 무왕에게 명을 거두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할수없이 정복에 나가 흑수말갈에 거의 도달하여서도 또 다시 공격의 부적절함을 고하였다. 그러자 격노한 무왕은 아우 대문예를 처형하려 하였고,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당나라에서는 대문예를 환대하고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이란 벼슬까지 하사하였다. 발해는 대문예를 송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나라의 산동반도를 공격하도록 하였다(732년, 仁安 13년 9월). 반도의 등주를 공격하여 점거하고 그곳의 지방장관인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당은 당황하여 신라인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통해 신라와 연락하여 지원병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발해 남쪽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당은 더 이상 발해를 공격하지 않았고, 발해 역시 산동반도를 지배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발해가 강대국 당을 공격하여 국력을 해외에 떨친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신라와 당은 외교관계가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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