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박씨오충정려

밀양박씨오충정려

[ 密陽朴氏五忠旌閭 ]

요약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예양리에 있는 정려로서, 박천붕(朴天鵬)과 그의 다섯 아들이 행한 구국(救國)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밀양박씨 오충정려 오충각

밀양박씨 오충정려 오충각

박천붕은 본관이 밀양(密陽)이며, 자는 익호(翼乎), 호는 규정(樛亭)이다. 1554년(조선 명종 9) 충청도 연기현 북이면 두옥동에서 태어났으며, 조헌(趙憲)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571년 무과에 급제한 뒤 한성부 참군이 되었으나, 1587년 조헌이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낙향하자 두옥동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박천붕은 그의 종사관이 되어 8월 청주성싸움에서 선봉장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왜병 수십 명을 베고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박천붕은 황희(黃喜)의 후손인 황달효(黃達孝)의 딸과 결혼하여 원겸(元謙, 1582~1637)·인겸(仁謙, 1584~1637)·예겸(禮謙, 1586~1637)·의겸(義謙, 1591~1637)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으며 아버지의 충정을 마음에 새기고 자란 원겸 등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뜻을 이어 국난을 구하기 위하여 나섰다. 4형제는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의 막료로 활약하며 1637년 죽산산성전투의 선봉장으로 나서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모두 순국하였다.

당시 연기현감 백대기(白大埼)가 <제오충유허문(祭五忠遺墟文)>을 지어 5부자의 충절을 애도하였으며, 1747년(영조 23) 두옥동에 정려가 세워졌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도 2개의 중수기(重修記)가 남아 있다. 1920년 일제가 최익현(崔益鉉)이 지은 <정려비음기(旌閭碑陰記)>와 <정려기(旌閭記)>를 없애고 정려도 헐어버리려고 하자 현재의 위치(예양리 산 21번지)로 옮겨 지었다.

1977년 오충각(五忠閣)을 개축하고 주변을 정비하면서 정자도 함께 건립하였다. 한편 호남 지방으로 이거한 후손들에 의하여 전라남도 담양에도 5부자의 충정을 기리는 정려가 세워졌으며, '담양 오충정려'는 1975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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