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용수비대

독도의용수비대

[ 獨島義勇守備隊 ]

요약 1953년 4월 20일부터 1956년 12월까지 독도에 침입하는 일본 어선과 순시선 등에 맞서 독도를 지켜 낸 순수 민간 조직.
구분 민간 의용수비대
설립일 1953년 04월 20일
설립목적 독도 수비
주요활동/업무 독도 경비,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격퇴, 독도 동도 암벽에 '한국령' 표시 조각
규모 33명

1952년 2월 27일 미국이 독도를 미군 폭격 훈련지에서 제외한 뒤, 의 혼란을 틈타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침탈 행위가 잦았다. 심지어 같은 해 8월에는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독도에 상륙해,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을 독도에 세우는 등 계속해서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불법 침탈 행위가 계속되자 일본의 터무니없는 독도 소유권 주장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독도 근해에 나타나는 일본인들을 축출함으로써 일본 어선의 독도 근해 작업 방지 및 주민의 생존권 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53년 4월 20일에 조직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6·25전쟁에 참여했다가 전상을 입고 특무상사로 전역한 울릉도 출신 홍순칠(洪淳七)은 1952년 가을부터 독도의용수비대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부산으로 가서 단신으로 독도를 지킬 각종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였다.

무기와 장비가 갖추어지자, 홍순칠은 1953년 4월 20일 드디어 울릉도 청년 45명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다. 대장은 홍순칠이 맡았고, 편제는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으로 짜여졌다. 이 가운데 3명을 제외하면, 모두 6·25전쟁에 참전했던 전투원 출신이다.

장비는 2정, M2 3정, M1소총 10정, 2정, 50발, 0.5t 1척 등이다. 나중에 등을 추가로 구입하였고, 의용수비대원 가운데 자의로 빠진 사람을 빼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대장 홍순칠을 포함해 모두 33명이다.

홍순칠은 의용대 조직과 동시에 보트를 타고 독도에 도착해 경비를 시작하였다. 의용대는 같은 해 6월, 독도에 접근한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귀향 조치한 뒤, 7월 12일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경기관총으로 집중 사격해 격퇴하였다. 이 전투가 의용대 최초의 전투이다.

첫 전투에서 장비의 보충이 시급함을 깨달은 홍순칠 대장은 다시 육지로 나가 어렵게 M2 2정과 박격포 한 문을 구입하였다. 이어 8월 5일에는 동도(東島) 바위 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 자를 새겨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1954년 8월 23일,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을 총격전 끝에 다시 격퇴한 뒤, 그해 11월 21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3척 및 1대와 총격전을 벌여 역시 격퇴하였다. 이 전투로 일본 쪽에서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후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갈 때까지 수비대원 33명은 한국 영토인 독도를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 공로로 홍순칠은 1966년 5등 근무공로훈장, 나머지 대원들은 방위포장을 받았고, 홍순칠에게는 1996년 삼일장이 추서되었다.

수비대원 33명은 고성달, 구용복, 김경호, 김병렬, 김수봉, 김영복, 김영호, 김용근, 김인갑, 김장호, 김재두, 김현수, 박영희, 서기종, 안학률, 양봉준, 오일환, 유원식, 이규현, 이상국, 이필영, 이형우, 정원도, 정의관, 정재덕, 정현권, 조상달, 최부업, 하자진, 한상용, 허신도, 홍순칠, 황영문 등이다.

참조항목

카테고리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