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걸
[ 丁傑 ]
- 요약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과 함께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행주대첩과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했다.
출생-사망 | 1514.12.2 ~ 1597 |
---|---|
본관 | 영광(靈光) |
자 | 영중(英中) |
호 | 송정(松亭)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군사 |
출생지 | 전남 고흥 |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이다. 1514년( 9) 12월 2일, 지금의 전라남도 (浦頭面)에서 태어났다. 1544년 무과에 급제한 뒤, (奉事)를 거쳐 (宣傳官)을 지냈다. 1553년( 8) 서북면 병마(兵馬萬戶)를 지낸 뒤, 1555년 때 달량성(達梁城)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南桃浦) 만호가 되었다.
이듬해 부안을 거쳐, 1561년 온성, 1568년( 1)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 정벌과 국경 수비에 공을 세웠다. 그 뒤 1572년 경상우도 , 1577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578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1581년 , 1583년 전라도 , 1584년 창원부사, 1587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 수군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1년에는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았으며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만들었고 화전, 철령전 등 여러가지 무기를 만들었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李舜臣)과 함께 각종 해전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1592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이래, 7월의 대첩에 이어, 9월 1일의 부산포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2월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있으면서 에 참가해,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 아군에게 화살을 조달해 승리로 이끄는 데 이바지한 뒤, 다시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6월, 이순신의 요청으로 한산도에서 왜적을 방어하고, 12월에는 전라도로 부임해 남서 해안에서 왜적 토벌에 전념하였다.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여름 83살의 나이로 죽었다. 포두면 안동사(安洞祠)에 배향되었다.
참조항목
, , ,
역참조항목
,
카테고리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