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용

변희용

[ 卞熙瑢 ]

요약 사회주의 운동가로 1923년 일본에서 북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귀국 후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해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신간회 고령지회를 책임지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보수세력인 한국민주당에 가담했다.
출생-사망 1894 ~ 1966
일파(一波)
국적 한국
활동분야 사회운동
출생지 경북 고령

호는 일파(一波)이다.1894년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났으며, 제2·4·5·6·7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순천(朴順天)의 남편이다. 일본의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입학하여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킨 조선유학생학우회(1912년 10월 결성)에 가입하였다.

1920년 7월 조선유학생학우회 국내 순회강연에 참가하였으며, 이듬해 게이오대학을 졸업하였다. 같은해 (金若洙)·정태신(鄭泰信)·김두희(金枓熙)와 함께 《 大衆時報》를 창간하였고, 1923년 김약수·(金鍾範)·송봉우(宋奉瑀)·(李如星) 등과 함께 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3월 귀국하여 (崔南善)이 창간한 《》 학예부장이 되었고, 그해 4월에 (金思國)·(崔昌益)·(李英) 등과 함께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10월 북성회가 발전적으로 해체한 뒤 결성한 의 기관지 《사상운동》을 이여성과 함께 발간하였으며, 1927년 9월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인 (新幹會) 고령지회 책임자가 되었다.

광복 후 민족주의 보수세력이 집결하여 창당한 에 입당하였고, 조선의 광복을 위한 애국금을 모으기 위해 결성된 애국금헌성회(愛國金獻誠會)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교수가 되었고, 1960년 4·19혁명 때 교수데모에 참가하였으며, 그해 5월에 성균관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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